현역 최고령 배구선수 여오현(현대캐피탈)이 지난 5월23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어릴 적에는 야구를 즐겨 했다. “학교(대전 유성초)에 야구부가 있었다면 야구를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배구부가 창단됐고 운동이 너무 좋았던 그는 배구부에 들어갔다. 중학교 1학년 때 주위 권유로 잠깐 다른 종목 테스트도 봤다. 배구는 높이 싸움인데 키가 자라지 않았기 때문. 그런데도 배구를 계속하고 싶었고, 그때의 결심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10살 때부터 배구를 했으니까 햇수로는 35년째”라고 말하는 여오현 현대캐피탈 플레잉코치를 5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인터뷰했다.
1978년생인 여오현은 올해 한국 나이로 마흔다섯살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선수 유니폼을 입고 있다. 4대 프로 스포츠 현역 최고령 선수이고, 프로배구 역대 최고령 나이도 나날이 경신 중이다. 최다 경기 출전(2044경기), 디그 성공(5127개), 리시브 정확도(7708개) 누적 기록에서도 당당히 남자부 역대 1위를 달리고 있다. “45살까지 배구를 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기어이 지켜내고 있다.
처음부터 리베로라는 포지션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생 때 레프트 공격수로 뛰다가 리베로 제도가 도입된 뒤 포지션을 바꿨다. “처음에는 내 옷이 아닌 듯 불편하고 (공격수) 뒤에서 수비만 전담하니까 재미도 없었다”고 한다. “리베로 적응에 2년은 걸렸다”는 그는 “팬들이 좋아해 주고 다른 시각으로 리베로를 봐주니까 나중에는 수비하면서 희열을 느끼게 됐다”고 밝혔다. 경험치가 쌓인 뒤에는 공격수들의 버릇까지 일일이 다 파악해 상대가 공을 때리기 전 미리 수비 위치에 가 있는, 일명 작두 탄 수비를 여러 차례 보여주기도 했다. 여오현은 “어느 쪽으로 공을 잘 때리고 속임수 공격을 어떻게 하는지 리베로를 오래 하다 보면 다 알게 된다”고 했다.
여오현(현대캐피탈)이 2020년 11월4일 충남 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배구 정규리그 대한항공과 경기에서 수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삼성화재에서 시작(2000년)된 그의 프로 생활은 영원한 ‘맞수’인 현대캐피탈에서 끝을 맺게 된다. 삼성화재에서도, 현대캐피탈에서도 우승의 기쁨을 마음껏 누렸다. 이적 첫해(2013~2014시즌) 정규리그 챔프전을 놓친 것은 내내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지만, 함께 선수생활을 했던 최태웅(46) 현대캐피탈 감독과 2016~2017시즌과 2018~2019시즌 리그 정상에 선 것은 아주 뿌듯하다.
여오현은 “최태웅 감독과 감독, 선수로 만날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 몸 상태 관리를 많이 해준다”고 했다. 최태웅 감독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여오현은 수비 감각으로만 따지면 아직도 현역 최고”라면서 “워낙 타고난 운동 감각이 있고 강한 승부욕이 있다. 후배들에게도 안 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고 했다. 최태웅 감독과 여오현은 세터와 리베로로 2002 부산아시안게임 때 금메달을 합작해낸 경험도 있다. 대표팀에서 궂은 일을 많이 하는 주장 역할을 꽤 했던 여오현은 “올림픽 본선 무대를 못 밟아본 것”이 못내 아쉽다.
현재 현대캐피탈 주전 리베로는 국가대표로도 활약 중인 박경민(23)이다. 여오현은 “(박)경민이는 리시브와 디그를 잘한다. 다른 리베로보다 한두 수 더 위에 있다”면서 “경기가 안 풀렸을 때 의기소침한 모습을 가끔 보는데 ‘지금의 게임보다 앞으로의 게임이 더 남았으니까 자신감 있게 하라’고 늘 얘기해준다”고 했다. 배구 ‘선수’로 또 다른 길을 후배들에게 보여주면서 정신적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코치’ 역할도 나름 하는 셈이다.
현대캐피탈은 2021~2022시즌 때 세대 교체 등을 겪으며 리그 꼴찌를 했다. 2022~2023시즌 반등이 필요하다. 여오현은 “작년보다 팀 성적이 나빠질 수는 없다. 오레올(36)이 팀에 다시 합류했는데 몸 상태를 보니까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현대캐피탈은 21일(남자부 기준)부터 코보컵(전라남도 순천)에 나서는데 여오현은 경기에 출장하지 않는다. 최태웅 감독은 “여오현이 8월부터 훈련을 시작했다. 컨디션이 아직 안 올라왔고 코보컵은 다만 준비 기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정규리그 때는 지난 시즌처럼 원 포인트 리시버 등으로 기용될 전망이다. 여오현은 “이번 주부터 함께하는 볼 트레이닝도 시작했는데 현재로서는 몸을 잘 만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현대캐피탈 숙소 겸 훈련장인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방에서 나오면 곧바로 배구 코트가 보이는 구조로 돼 있다. 사각형 건물 한가운데 코트가 있기 때문. 매일 아침 눈을 비비고 나와 코트를 바라보면서 ‘아휴, 이제 조금 있으면 유니폼도 안 입고 코트 밖에만 서 있어야 하네’라고 생각한다는 여오현. 그는 “내가 어떻게 이만큼 걸어왔나 싶기도 해서 허전함, 공허함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도 가끔 있지만, 코트 안에 들어가면 늘 변함없는 여오현만의 스타일을 마지막까지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 누구보다 코트 바닥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마지막으로 몸을 던져 공을 받아낼 그 순간을 매일같이 그리며 내일의 마침표를 준비 중인 당대 최고 리베로, 여오현이었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