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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감독의 용인술, 고독해도 간다

등록 2010-06-13 00:56수정 2010-06-13 13:30

골키퍼 정성룡 선택, 선수들에 대한 신뢰, 철저한 준비 빛나
“경기에 나가는 11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벤치의 선수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허정무 축구대표팀 감독은 12일(한국시각) 그리스와의 B조 첫 경기 승리(2-0)를 하루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팀을 운영하는 지도자는 고독하다. 모든 권한을 갖고 있지만 모든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허 감독은 팀 분위기가 흐트러지면 내부에서부터 붕괴된다는 것을 잘 안다. 카리스마 감독은 시작부터 끝까지 아마바둑 4단의 고도의 수읽기로 선수단을 장악해 왔다.

■ 정성룡 선택의 결단

허 감독이 그리스전 선발 11명을 발표할 때 가장 파격적인 것은 골키퍼로 정성룡(25·성남)을 내세운 것이다. 어차피 주전과 벤치선수를 가르는 일이 한솥밥을 먹는 처지에서 괴로운 일지만, 그렇다고 사사로운 정을 개입시킬 수도 없다. 그런데 이운재(37·수원)는 A매치 131경기에 출장한 노장이며, 필드에 서면 의욕이 넘치고, 여전히 반사 신경은 날카로운 선수다. 이런 자원을 두고 새로운 골키퍼를 세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결정이 아니다. 더욱이 골키퍼는 11명의 포지션 가운데 가장 중요해 쉽게 바꿀 수가 없다.

 그런데 허 감독은 과감하게 결단을 했다. 이기기 위해서는 누가 최선인가를 고민했기 때문이다. 허 감독은 이운재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동안 “골키퍼 포지션에 정해진 것은 없다. 코치진의 의견을 따를 것이다”고 했다. 팀 훈련에서도 정성룡을 주전 조인 주황색 조끼를 입힌 팀에 먼저 배치했지만, 후반전에는 꼭 이운재를 주전팀 수문장으로 세워 자존심을 세워 주었다. 그리스전 시작 2시간 전에 선발명단을 선수단이 모인 가운데 발표했는데, 이 때는 다른 어는 때보다 오랜 시간 선수들과 대화를 했다. 선발로 나가는 선수 못지 않게 벤치에 앉는 선수들의 마음가짐을 한 가지 목표에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순발력과 민첩성, 킥력 등에서 상승세를 보인 정성룡은 그리스전을 기점으로 한국의 새 간판 수문장으로 입지를 굳히게 됐다.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를 시도한 허정무 감독의 계획에 부응하듯 정성룡은 매끄럽게 월드컵 본선 첫 무대를 무실점으로 장식했다.

■ 조용형과 기성용에 대한 신뢰

중앙 수비수 조용형(27·제주)만큼 논란이 된 선수는 없을 것이다. 조용형의 키는 1m82로 거대한 체구의 중앙 수비수에 익숙한 팬들한테는 낯설다. 때문에 조용형이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조금의 실수라도 하면 일부 팬들은 비난의 화살을 허 감독한테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허 감독은 ‘제 2의 홍명보’라고 불리는 조용형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허 감독은 “수비에서 공격 전개 때 조용형의 능력이 빛날 때는 없다”고 했다. 수비에서도 길목을 지키고, 다른 선수들 뒤로 커버플레이 들어가는 것도 일품이다. 12일 그리스전에서는 1m90넘는 상대의 하리스테아스, 사마라스 등 장신 공격수들의 고공헤딩을 미리 막아내는 투혼의 경기로 이날 승리의 일등공신이 됐다. 올해 셀틱으로 이적한 기성용(셀틱)은 시즌 중후반부터 경기에 출장하지 못하고 벤치를 지키는 일이 잦았다. 축구팬들은 경기감각이 떨어졌기 때문에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기는 힘들다는 의견을 내보였다. 그러나 그 때마다 허 감독은 “기성용처럼 좋은 선수는 없다. 오히려 시즌경기에서 가라앉을 경우 월드컵 본선에서 더 잘할 수 있다”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그 말을 입증하려는 듯, 기성용은 이날 그리스와의 경기에서 100% 이상 자기의 기량을 발휘했다. 상대가 강한 압박으로 길을 차단하려고 해도 여유있게 공을 제치는 개인기와 폭넓은 시야로 약한 곳을 찔렀다. 선제골로 연결된 측면 프리킥은 강하고, 낮고, 빨라서 이정수가 맞춤하게 넣을 수 있었다. 허 감독의 눈이 예리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 이영표, 박지성과의 변함없는 사제관계

한국팀이 강해진 이유는 큰 무대에서 주눅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세대 젊은피 이청용(볼턴)과 기성용 등이 중원에 포진해 있는 것도 컸지만, 역시 팀의 고참인 이영표(알 힐랄)와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 중심을 잡아 준 것이 중요했다. 둘 다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 감독을 할 때인 1999년, 2000년 발굴한 선수들로 각별한 인연이다. 이영표는 이날 왼쪽 풀백으로 33살의 나이답지 않은 기동력과 스태미너를 보여 주었다. 첫골로 이어진 프리킥을 얻어냈고, 후반 상대의 파상공세를 몸으로 막아내는 투혼을 발휘했다. 개인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판 전체를 보고 균형을 잡아주려고 하는 이영표의 모습은 공을 잡은 상태에서 가장 안정적인 곳으로 전달할 때 드러났다. 박지성은 허정무 감독과 마치 복제인간처럼 거의 같은 생각을 할 단계로 호흡이 잘 맞는다. 허정무 감독은 “주눅들지 말아야 한다”고 선수들에게 강조하면, 박지성은 팀원들에게 “우리의 경기력을 후회없이 보여주자”며 좀더 설득력있게 주지시킨다. 주장 박지성이 그리스전 쐐기골을 터트리는 등 해결사 구실을 하면서 자연스러운 권위가 만들어진다. 허 감독이 발탁하고 믿음을 준 두 선수들은 사실상 허 감독이 역대 토종감독 처음으로 월드컵 첫승을 일구도록 측면에서 도운 일등 공신들이다.

■ 허허실실 실용의 지도자

허 감독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는 다 했다. 좋다는 영양제는 영국에서 수입했고, 산소량을 조절해 고지대 적응효과를 주는 산소마스크는 미국에서 수입했다. 사상 처음으로 조리사 2명을 동승시켰고, 선수들이 남아공의 밤추위에 컨디션이 떨어질까를 걱정해 전기장판까지 30장을 준비시켰다. 32개 출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선수들의 운동량을 측정할 수 있는 무선 송수신 조끼를 입혀 경기력을 과학적으로 측정해온 것도 현명한 결단으로 판정났다. 무엇보다 “유쾌한 경기”라는 발상으로 진작부터 선수들에게 부담을 갖기보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면서 경기력을 발휘하도록 자락을 깔아준 것이 노련했다. 고지대 훈련 등의 효과에 의문을 표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일관되게 “계획된 스케줄대로” 훈련하면서 그리스전에 선수들의 체력을 100% 끌어올린 것도 좋았다. 그동안 해발 0~50m의 더반에서 훈련해온 오토 레하겔 그리스 감독은 “한국과 경기를 벌이는 넬슨만델라베이 경기장에 맞춰 저지대 훈련을 했다”고 했는데, 허 감독의 판단에 비쳐보면 한 수 아래임을 드러낸 꼴이다.

허정무 감독은 그리스전에서 후반 신예 이승렬(21·FC서울)을 공격수로 투입했다. 발빠르고 감각적인 이승렬을 새로운 무기로 키우기 위한 그의 계획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미드필드 패스플레이에 의한 공격과 빠른 축구, 유비무환의 철저한 준비, 선수 하나하나를 팀으로 만들어내는 허 감독의 용병술이 그리스전을 통해 더욱 빛났다.

포트엘리자베스/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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