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토트넘 홋스퍼)의 능력치가 표기된 ‘피파23’(FIFA23) 점수 페이지. 피파23 누리집 갈무리
유명 축구 게임 시리즈 ‘피파22’(FIFA22) 공개를 앞둔 지난해 가을 엘링 홀란드(22·맨체스터시티)는 독일 분데스리가 도르트문트 선수였다. 팀 동료 주드 벨링엄이 새 게임 속 홀란드의 능력치(88점)를 보여주면서 “만족해?”라고 묻자 홀란드는 씩 웃는다. “나쁘지 않은데.” 벨링엄이 다시 묻는다. “(로베르토) 레반도프스키는 92점이고 (킬리안) 음바페는 91점이야. 여전히 만족해?”
다소 표정이 굳어진 홀란드가 짧게 답한다.
“노 코멘트.”
스포츠와 스포츠게임의 관계는 유별나다. 스포츠게임은 실제 스포츠 경기의 진행, 스포츠 선수의 움직임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지향을 둔다. 이 점 때문에 가상과 현실의 경계는 여러 방면에서 허물어진다. 게임 속 선수들의 능력치가 갱신되면 상처받거나 흥분한 팬들의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이 비공식 ‘스카우팅 리포트’가 예단한 미래가 현실과 들어맞을 때 사람들은 “과학이다”라며 감탄한다.
지난해 10월 공개된 피파22 홍보 영상에서 독일 분데스리가 도르트문트 주드 벨링엄(왼쪽)이 “(레반도프스키·음바페보다 능력치가 낮은데) 그래도 만족해?”라고 묻자 엘링 홀란드가 “노 코멘트”라고 답하고 있다. 도르트문트 구단 유튜브 갈무리
지난 9월 ‘엔비에이 투케이23’(NBA 2K23·9일)과 ‘피파23’(FIFA23·30일)이 발매됐다. 각각 농구와 축구를 대표하는 게임 시리즈의 최신작이다. 새 작품에는 새 논쟁이 뒤따랐다. 영미권 스포츠 커뮤니티 <스포트 바이블>에는 “
네이마르(파리 생제르맹)와 손흥민(토트넘 홋스퍼)의 능력치가 같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 올라왔다. 피파23 기준 둘의 점수는 89점이다.
손흥민의 점수는 그대로지만 네이마르는
전 시리즈에 비해 2점이 깎였다. 동급에는 그 밖에도 사디오 마네(리버풀), 해리 케인(토트넘) 등이 있었다.
엔비에이 투케이23은 좀 더 시끄러웠다. 엘에이(LA) 레이커스의 주전 가드
러셀 웨스트브룩이 78점으로 책정된 것. 전작(86점)보다
8점이나 깎였다. 5년 전 ‘시즌 트리플 더블’ 신기원을 이룩하며 정규 최우수선수(MVP)에 뽑혔던 천재 가드에 대한 “무례한 처사”라는 비판과 지난 시즌 레이커스 플레이오프 탈락에 지분이 큰 그의 기량 저하를 반영한 “합당한 점수”라는 주장이 부딪혔다. 2년 전 미국 지미 팰런쇼에 나와 90점을 받고도 “신경 안 쓴다”며 카드를 던져 버렸던 웨스트브룩 본인의 반응은 알려진 바 없다.
러셀 웨스트브룩의 ‘엔비에이 투케이23’(NBA 2K23) 능력치. 엔비에이 투케이 누리집 갈무리
<디 애슬레틱>의 ‘풋볼매니저22: FM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 감독하기’ 연재 페이지. 디 애슬레틱 누리집 갈무리
스포츠게임의 ‘재현’은 선수의 기량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축구 감독의 입장에서 구단을 운영하도록 한 ‘풋볼매니저(FM) 시리즈’는 축구 산업 자체를 베껴왔다. 전 세계 프로리그 선수의 세밀한 신체 지표는 물론 감정, 협상 스타일, 잠재력에 더해 실제 코칭스태프와 스카우트의 역량까지 구현한 ‘극사실주의’ 게임이다. 스포츠 전문매체 <디애슬레틱>에서 기자가 직접
풋볼매니저로 축구팀을 운영하는 컨텐츠를 연재할 정도다.
스포츠게임이 다시 스포츠가 되기도 한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2004년부터 피파 시리즈 개발사인 일렉트로닉 아츠(EA)와 함께 ‘피파e 월드컵’이라는 이(e)스포츠 대회를 열고 있다. 지난 7월 열린 2022년 대회의 우승자는
25만달러(3억5470만원) 상금과 함께 피파 올해의 선수상 시상식 참석 티켓을 받았다. 누구나 집에서 장비와 게임만 갖추면 예선에 참여할 수 있다. 아직 한국인이 우승한 적은 없다.
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