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신인드래프트 때 홍준학 삼성 라이온즈 단장은 이런 말을 했다. “삼성 라이온즈 2019년 1차 지명은 사실 10여년 전에 이미 결정했다. 야구에 대한 진지함이 있다. 천재성 보다는 노력하는 모습이 더 돋보인다. 그러면서 스타성도 있다.”
6살 때 대구 시민야구장에서 뽀얀 얼굴에 사자 머리를 휘날리며 씩씩하게 공을 던졌던 어린 삼성 팬. 스케치북에 김상수, 구자욱, 김민수 등의 이름이 들어간 수비 라인업으로 마운드에는 ‘원태인’이라는 이름을 새겼던 이 꼬마는 올 시즌 사자 군단 에이스를 넘어 KBO리그 우완 최고 투수를 넘보고 있다. 성적이 이를 증명한다.
원태인(21)은 17일 현재 다승 1위(6승), 평균자책점 1위(1.00)에 올라 있다. 첫 등판 패전 이후 6연승을 달리고 있으며, 7경기 45이닝을 던지는 동안 피홈런은 단 한 개도 없다. 선발 등판 7경기 중 6경기에서 퀄리티스타트(QS)를 달성했다. 대체선수 승리기여도(WAR)는 3.09(이하 스탯티즈 기준)로 투타 합해 유일하게 3점대가 넘는다. 2019년 4승(8패), 2020년 6승(10패)을 올렸던 터라 개인 시즌 최다승에는 1승만 남겨놓고 있다. KBO리그 월간(4월) 최우수선수(MVP)로도 뽑혔다. 대구에서 나고 자랐고 어릴 적부터 이미 ‘야구 신동’으로 입소문이 났던 터라 입단 때부터 삼성 팬들의 사랑을 아주 듬뿍 받았다. 팬들 사이에서는 ‘원태자’로도 불린다. 더그아웃에서 열성적으로 팀원들을 응원해서 ‘안방 1열 삼성 팬’으로도 통한다.
2005년 4월30일 대구 시민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와 기아 타이거즈의 경기에서 당시 야구 신동으로 불렸던 6살 원태인이 시구를 하고 있다. 뒤는 당시 삼성 소속이던 임창용. 삼성 라이온즈 제공.
원태인 또한 지금 순간을 즐기고 있다. 최근 〈한겨레〉와 통화한 원태인은 “내 기록을 매일 본다”면서 “아버지도 ‘너무 행복하다’고, ‘못다 한 꿈을 이뤄줬다’고 좋아하신다”고 말했다. 원태인의 아버지, 원민구 전 협성경복중 야구부 감독은 1984년과 1985년 삼성에 신인 지명 받았으나 은퇴 후를 생각해 실업야구(제일은행)에서만 뛰었다. 원 전 감독은 아들이 등판할 때마다 팔공산 갓바위에 올라 아들의 승리를 기원한다. 아들 성적이 좋아서 “올라가는 길이 즐겁다”고 한다. 원태인과 15살 터울의 형(원태진) 또한 에스케이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에 입단했었지만 1군 데뷔를 하지 못하고 부상으로 일찍 은퇴했다. 원태진은 개인 인스타그램에 ‘못다 이룬 내 꿈의 희망 원태인의 형’이라고 자기소개를 한다.
원태인의 각성은 ‘제구되는 슬라이더’로 압축된다. 원태인은 현재 체인지업 구종 가치 리그 1위(11.6)에 올라 있는데 여기에 올해 슬라이더(리그 6위)까지 곁들여지니 타자들이 헷갈린다. 체인지업, 슬라이더는 통상적으로 비슷한 속도로 날아오다가 타자 앞에서 떨어지는데 오른손 타자 기준 체인지업은 오른쪽으로, 슬라이더는 왼쪽으로 떨어진다.
정현욱 삼성 투수코치는 “체인지업은 속구의 위력이 없으면 통하지 않는다. 작년에는 도망가는 피칭이 많았는데 올해는 1회부터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공격적인 피칭이 통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박용택 〈케이비에스 엔〉 해설위원 또한 “원태인의 체인지업은 원래 역대 톱 3안에 드는 선수였다”면서 “트래킹 데이터를 보면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늘어난 반면 슬라이더의 경우 작년보다 오히려 떨어졌다. 속구-슬라이더 구속 차이가 더 생긴 게 오히려 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하는 것 같다”고 했다.
원태인은 제3구종 슬라이더 안착에 대해 “겨울 훈련 때 (최)채흥 선배가 슬라이더를 ‘공을 때리는 느낌’으로 던져 보라고 조언해줬다. (정현욱) 코치님도 변화구를 던질 때 손으로 던진다는 느낌으로 해보라 해서 그렇게 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피홈런이 없는 데 대해서는 “속구 제구력에 더욱 신경 쓰다 보니 실투가 안 나오는 것 같다. 시즌 전에 (강)민호 형과 우타자 몸쪽 제구를 잡고 가자 했는데 시범경기를 치르면서 감이 잡혔다”고 했다.
준비 자세가 달라진 것도 크다. 원태인은 “작년에는 긴 이닝 투구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위기 상황 때도 투구수 조절을 신경 썼는데 올해는 선발을 준비하면서 ‘몇 이닝 던지자’라고 마음 먹기 보다는 ‘1회만 막자’고 생각한다. 위기 상황에서도 ‘이번 회만 막자’고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1이닝씩 끊어 던지려고 하니까 평균 구속도 안 떨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발상의 전환이 오게 된 계기도 최채흥의 조언이 컸다고 한다.
프로 1~2년차 때 후반기 들어 난조를 보인 데 따른 깨달음도 나름 있었다. 올해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이어가면서 그만의 루틴을 정립하려고 애쓰고 있다. 선발 등판 전날 공을 전혀 안 만지는 것도 하나의 루틴이 됐다. 가벼운 단거리 달리기와 수건을 활용한 셰도 피칭만 한다. 정현욱 코치는 “(원)태인이는 올해 운동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신인급 선수들은 겨우내 2~3달간 체력 훈련을 한 것으로만 한 시즌을 치르려고 하는데 태인이의 경우 올해 시즌 동안에도 웨이트를 계속하고 있다. 재능 있는 선수가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는 노력까지 하니까 변화의 속도가 더 빠르다”고 했다. 그는 이어 “태인이를 보면 어릴 적 배영수를 보는 것 같다. 승부욕도 있고, 목표 의식도 뚜렷하다”고 덧붙였다.
‘코난티 다비투르(Conanti dabitur)’. 우연히 원태인의 마음에 스며든 라틴어 명언이다. 뜻은 ‘노력하는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원태인은 신인드래프트 당시 “다시 만들어갈 삼성 라이온즈 왕조의 주역이 되고 싶다”고 했었다. 스스로 보기에도 “귀여웠던” 아기 사자 ‘심바’는 이제 ‘라이언킹’이 되고 있다.
김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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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30일 대구 시민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와 기아 타이거즈의 경기에서 당시 야구 신동으로 불렸던 6살 원태인에게 배영수(삼성)가 시구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정현욱 삼성 투수코치는 “원태인이 승부욕과 목표 의식에 있어 배영수와 닮았다”고 했다. 삼성 라이온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