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희 기자의 맛있는 야구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은 말한다. “너희는 내일을 위해서 살지, 난 오늘만 산다.” 원빈은 ‘오늘’만 살기에 안간힘을 쓰면서 하루하루를 버틴다. 하지만 그런 오늘이 매일 이어진다면 결국 번아웃(탈진)이 일어나지 않을까.
오랜 시간 1.5군 신분으로 출전 시간이 적었던 선수들을 만나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한 타석에 나의 모든 것을 보여줘야 했다.” 최근 만난 정의윤(SK)도 비슷했다. “한 타석 못 치면 더그아웃에서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하지만 주전으로 기용된 뒤에는 한 타석 못 쳐도 다음 타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이전 타석을 분석하면서 다음 타석을 기다렸다.” 데뷔 이후 한동안 대타로만 기용됐다가 2014년부터 주전을 꿰찬 같은 팀의 이재원 또한 “대타 때는 못 치면 다시 경기에 못 나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항상 있었다. 하지만 퓨처스(2군) 리그 두 시즌 동안 풀타임으로 뛴 경험이 여유를 만들어줬고 ‘오늘 못 쳐도 내일 다시 치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올 시즌 케이비오(KBO)리그는 10여년 가까이 붙박이 주전이 아닌 1.5군 정도로 기용됐던 선수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 타점 부문 상위권에 올라 있는 정의윤을 비롯해 타격 1위 김문호(롯데)나 에릭 테임즈(NC), 최정(SK) 등과 홈런왕 경쟁을 펼치고 있는 김재환(두산), 그리고 두산의 4번 타자를 꿰찬 오재일 등이 올해 비로소 만개했다. 김문호는 2006년, 김재환은 2008년, 오재일은 2005년 프로에 데뷔했는데 셋 모두 작년까지 풀타임으로 시즌을 보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2005년 데뷔한 정의윤 또한 규정타석을 채운 해가 2013년뿐이다. 이들은 풀타임 주전 목표로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냈고 ‘내일’이라는 미래가 있게 되자 더욱 힘을 내고 있다.
그동안 김현수(볼티모어 오리올스)를 힘들게 했던 것 또한 오늘 4안타를 쳐도 내일 선발 출전을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김현수는 경기에 출전하지 않는 기간에도 타격감을 유지하려 훈련에 매진했고 비로소 벅 쇼월터 볼티모어 감독의 고집을 실력으로 꺾으며 연속 선발 출전의 기회를 얻었다. 국내 프로야구에서 ‘타격기계’로 불렸던 그가 불안한 내일에도 버틸 수 있던 것은 아마도 신인 시절의 경험 때문일 듯싶다. 김현수는 고졸 신고선수(연습생)로 입단해 2군 밑바닥부터 치열하게 경쟁을 뚫고 1군에 올라왔으며 결국 현역 선수 통산 타율 3위(0.318)의 기록을 갖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하지만 김현수에게 불안한 오늘이 계속 이어졌다면 분명 번아웃이 왔을 것이고 자신의 실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도 좋고 오늘을 오늘만의 방식으로 열정적으로 풀어내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이 있다는 것만큼 좋은 게 있을까. 아무리 힘주어 오늘을 살아도 내일의 희망이 없다면 더욱 절망의 늪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일반 사회 또한 비정규직이 많은 곳에서는 희망은 싹트지 않는다. 내일이 있는 삶과 오늘만 사는 삶의 차이다.
만년 1.5군 선수들의 뜻밖의 활약으로 프로야구의 ‘내일’은 더욱 풍성해졌다. ‘내일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은 결국 지도자, 감독의 몫일 것이다. 주전이든 비주전이든 선수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내일도 경기할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일 테니까.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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