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숨진 원년 삼성 라이온즈의 에이스 황규봉 선수가 80년대 프로야구 마운드에서 역투하는 모습.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의 원년 에이스 황규봉 전 삼성 투수코치가 향년 63세로 별세했다. 황 전 코치는 지난 18일 대장암으로 숨졌으나, 소식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20일 발인에 이어 고향인 경북 성주의 선산에 잠들었다.
황 전 코치는 1982년 프로야구 원년, 삼성의 에이스로 그해 15승11패11세이브(평균자책점 2.47)를 기록했다. 당시 24승을 거둔 박철순(OB 베어스)에 이어 다승 2위에 올랐고, 19세이브포인트(11세이브+8구원승)로 첫해 구원왕을 차지했다. 당시 프로야구에선 선발 투수와 세이브 투수의 구분이 명확치 않아 황 전 코치는 선발, 중간계투, 마무리 등을 가리지 않고 위기 때마다 마운드에 올랐다. 그해 47경기에 출전해 최다경기 출전을 했고, 200이닝 이상을 던졌다. 첫해 너무 무리해 이듬해에는 6승4패로 다소 부진했으나, 1984년 10승2패로 승률왕을 차지했고, 삼성이 전·후기 통합우승을 차지한 1985년에는 김시진·김일융의 각 25승에 이어 14승을 거두는 등 꾸준히 활약했다. 1986년 시즌 뒤 은퇴했다. 통산 성적은 5시즌 154경기 48승29패24세이브, 평균자책점 3.08이다.
황규봉은 ‘황소’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성실함과 꾸준함, 그리고 위기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구위와 묵직한 강속구 등으로 초창기 코칭스태프에 큰 믿음을 줬지만, 아마 시절의 그를 아는 이들은 아마 때의 구위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도 있다. 경북고 2학년 때인 1971년, 1년 선배인 남우식의 뒤를 바치면서 경북고가 그해 고교야구 경기를 싹쓸이 우승하는 6관왕에 오르게 한 주역이었고, 남우식이 졸업한 뒤에는 에이스가 되어 동기인 좌완 이선희와 함께 1972년 대통령배 우승, 청룡기 준우승 등을 차지했다. 고려대 1학년 때부터 국가대표에 선발됐다.
그러나 1973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대회 때 대표팀이 묵던 호텔에 불이 나 3층에서 뛰어내려 크게 다친 뒤 사실상 ‘황규봉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허리 부상, 늑막염으로 정상적인 투구가 힘들었고, 고소공포증까지 얻어 비행기도 타지 못했다. 3년간 병원 치료를 받다 다행히 대학 4학년 때인 1976년 무렵, 재기에 성공하면서 국가대표로 복귀했고, 1977년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에 입단했다. 입단 첫해인 1977년 중순까지만 해도 20승 이상을 올리며 다시 국내 최고의 투수 자리를 되찾았다. 첫번째 재기였다.
하지만 그해 팀이 일본 원정을 가던 중 비행기 안에서 다시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며 병원에 입원해 1년 가량 또 마운드를 떠났다. 그러다 1979년 다시 실업야구 평균자책점 1위에 오르는 등 한국화장품의 에이스로 다시 우뚝 섰다. 두번째 재기였다. 1980년에는 국가대표로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 참가한다. 이처럼 황규봉은 몇 차례에 걸친 위기와 시련을 거듭 딛고 일어서는 등 박철순 이전의 ‘원조 불사조’였던 셈이다.
프로에서도 원년 15승 이후, 서른 살이 된 1983년에는 6승으로 크게 부진해 ‘이제 끝났다’는 평가가 많았으나, 이듬해인 1984년 10승2패로 승률왕을 차지하며 다시 한 번 일어섰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삼성에서 코치를 지낸 뒤 야구계를 떠났다.
이후 그의 삶은 몇 번의 사업 실패 등으로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졌고, 그러면서 스스로 야구인들과 교류를 끊었고, 가족과도 헤어져 부산에서 홀로 살아오는 등 말년이 불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병도 이 와중에 키운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1월 몸이 너무 아파 찾은 병원에서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결국 마지막 ‘재기’는 성공하지 못한 채 떠났다.
권태호 기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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