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호(29·넥센)의 1회말 시즌 41호 홈런포가 터진 12일 저녁 서울 목동구장. 1루 수비 포지션에 있던 그의 경쟁자 에릭 테임즈(29·NC)는 글러브를 입게 갖다대며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전날 같은 구장에서 한 시즌 두번째 사이클링 히트를 치고 홈런 36개를 기록하며 기세를 올린 테임즈였지만, 그날 박병호도 두개의 홈런 아치를 그리며 현역 최고의 슬러거임을 과시한 바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엔씨 선발투수 이태양을 상대로 한 박병호의 홈런포에 자극받은 때문인지 테임즈도 이날 가만있지 않고 곧바로 홈런포를 가동했고, 둘은 장군멍군했다. 테임즈는 4회초 상대 바뀐 투수 김영민을 상대로 오른쪽 담장을 넘기는 2점 홈런(시즌 37호)으로 맞불을 놓은 것이다. 6회초 투아웃에서는 좌전 안타를 치고 출루한 뒤 이호준 타석 때 2루 도루까지 성공시켰다. 이제 도루 1개만 추가하면 국내 8번째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역대 마지막 30-30 클럽 가입자는 박재홍(당시 현대)으로 2000년에 기록했다.
2015 프로야구에서 미국 출신 외국인 슬러거 테임즈와 토종 거포 박병호의 홈런 등 타격 경쟁이 점입가경이다. 테임즈는 11일 목동 경기에서 세운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 한 시즌 두번째 사이클링 히트라는 대기록 때문에, 같은 1루수 겸 4번 타자인 박병호와 함께 시즌 막판까지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 자리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일 것으로 전망된다. 테임즈는 타율 0.387로 3위 박병호(0.351)를 제치고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다. 장타율도 전날 기준으로는 0.819로, 박병호(0.727)보다 앞선다.
“매일 경기가 끝나면 호텔방에서 밴드를 활용해 운동을 한다. 필요한 밴드들을 큰 가방에 가지고 다니면서 스윙이나 자세, 신체 부분 등을 단련한다. 난 스트레칭을 정말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러지 않으면 쉽게 딱딱해지기 때문이다.” 테임즈가 지난 6월 초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가 경기장이나 연습장 아닌 숙소에서도 얼마나 자기 관리에 충실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철통처럼 단단한 몸집에다 길게 기른 턱수염으로 다소 험상궂은 이미지를 풍기지만 정작 그는 쾌활한 성격이어서 팀 동료들과 친화적이고, 경기장에서는 정말 잘 치고 잘 달린다. 엔씨가 40여 경기를 남겨두고 있어 시즌이 끝날 때쯤에는 국내 첫 ‘40-40 클럽’ 가입도 가능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호타준족의 상징이다.
엔씨 홍보팀 관계자는 “올 시즌 초만 해도 도루하다 다치면 어쩌나 해서 테임즈에게 도루를 자제할 것을 요구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본인이 ‘괜찮다. 도루도 경기의 일부분’이라고 하면서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도루를 시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시즌 도루성공률은 82%를 넘는다.
그러나 박병호는 홈런(41개)과 타점(108점) 부문 선두로 테임즈(105타점)를 앞서고 있다. 박병호가 사상 최초로 4년 연속 홈런왕 등극에 성공하면 시즌 최우수선수 영예는 그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박병호는 11일 2개의 홈런을 작성하며 이승엽(삼성·2002~2003년)과 심정수(당시 현대·2002~2003년)에 이어 역대 세번째로 2년 연속 40홈런 고지도 밟았다.
평소 박병호에 대해 “파워가 좋은 선수”라고 평가하는 테임즈는 “박병호도 1루수, 나도 1루수다. 서로 수비를 하다 안타나 홈런을 치면 자주 보게 된다. 나도 열심히 하고 그도 열심히 하고.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
올 시즌 타격 3개 부문(타율, 홈런, 타점) 타이틀은 물론, 정규리그 최우수선수와 1루수 골든글러브까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테임즈와 박병호. 둘의 싸움은 1998년 ‘외국인 슬러거’ 타이론 우즈(당시 OB)와 ‘토종 홈런타자’ 이승엽(삼성)이 벌이던 홈런·타점왕 경쟁 구도를 연상시킨다는 얘기도 나온다. 당시 우즈가 홈런(42개)과 타점(103점) 부문 1위를 기록하면서 외국인 선수로는 최초로 정규 최우수선수에 등극한 바 있다.
김경무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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