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진(27·LA 다저스)을 보면 참 신기하다. 지난 시즌 유용하게 쓴 체인지업이 상대에게 분석되면서 올해 고전하겠다 싶었는데 어느새 다른 구질을 익혔다. 본인 스스로는 ‘고속 슬라이더’라 칭하고, 외신에서는 ‘커터(커트 패스트볼)’라고 언급하는 바로 그 공이다. 류현진은 어깨 부상으로 재활에 힘쓰던 지난 5월 릭 허니컷 다저스 투수 코치로부터 고속 슬라이더를 전수받았다. 불과 몇 주 만에 공 하나를 뚝딱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다. 하긴 서클체인지업도 그랬다. 류현진은 2006년 한화 입단 뒤 팀 선배 구대성에게 서클체인지업을 배우고 곧바로 써먹었다.
일반적으로 투수들은 구질을 익히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투구 자세와 손가락, 그리고 공 채는 기술이 구질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한때 ‘닥터 K’로 불리면서 최연소 100승을 달성했던 현대 김수경(현 고양 원더스)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현대 투수 코치였던 김시진 롯데 감독은 “김수경은 슬라이더는 잘 던졌지만 커브는 엄청 연습해도 잘 안됐다. 투구 자세에 따라 잘 던질 수 있는 구종이 있고, 몸에 기억된 투구 자세를 거스르고 다른 구종을 익혀나가기란 쉽지 않다”고 했다. 명품 슬라이더를 갖고 있는 김광현(SK)은 한때 팀 동료였던 송은범(KIA)의 슬로 커브를 배우려다가 실패했다. ‘커브의 달인’이었던 김상현(현 김태영·KIA)은 슬라이더까지 잘 던지려다가 투구 자세가 흐트러져 커브까지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보통 새 구종 연마에는 2~3년이 소요되며, 이후에도 결정구로 쓸 수 있을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만큼 어렵다.
1960년대만 해도 구종은 속구와 커브 정도뿐이었다. 그래서 국내 야구에 처음으로 슬라이더를 선보였던 김영덕 전 빙그레 감독은 실업야구에서 0.32의 경이적인 평균자책을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슬라이더뿐만 아니라 포크볼도, 체인지업도 없었다.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은 “1960~1970년대만 해도 속구와 낙차 큰 커브만 있으면 타자 상대가 가능했다. 다른 구질은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타격 기술이 발달하면서 한두 가지 구종만으로는 프로에서 살아남기가 불가능해졌다”고 했다. 속구, 체인지업만으로도 국내 무대를 평정했던 류현진이 그대로 한국 야구에 머물렀다면 진화할 수 있었을까.
차명석 <엠비시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주무기가 확실한 투수는 다른 구질을 배우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잘 던지는 공도 망가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한계는 닥치고 그때 가서 후회하면 이미 늦게 된다”고 말했다. 잘 던지지 못해도, 던지다가 실패해도 던져보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단조로운 구종 때문에 단명했던 선배 투수들을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살아가다 보면 빠른 속구를 던져야 할 때도, 느린 커브를 던져야 할 때도 있다. 때론 체인지업 같은 변칙적인 공도 필요하다. 갖고 있는 구질이 많을수록 난제를 해결해 나가기는 쉬울 것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과연 우리 삶에서는 안 던지는 공이 더 많을까, 못 던지는 공이 더 많을까.
김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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