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희 기자
[김양희 기자의 맛있는 야구]
지난가을 김포공항에서 제주행 비행기를 기다리다가 우연찮게 그를 만났다. 그는 팀 동료들과 함께 항공편으로 부산 원정경기를 떠나려는 찰나였다. 당시 그의 은퇴 이야기가 언론에 나왔고. 일부에서는 그의 은퇴를 말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푹 쉬라”고만 했다. “쉴 새 없이 뛰어왔으니 그럴 자격은 충분하다”고도 말해줬다. 그리고 품에 안겨있던 아이에게 속삭였다. “이분이 엄마 어렸을 때 우상이었어.” 그는 웃었다.
어릴 적 일기장에는 뛰었던 그의 팀 성적과 개인 타율이 꼼꼼히 적혀 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자율학습 시간 때는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고 손으로 가린 채 라디오 야구 중계를 몰래 듣고는 했다. 극적으로 점수가 났을 때는 환호성을 지를 수가 없어서 책상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불끈 쥐곤 했다. 그다지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 친구를 몇날 몇주 설득해 같은 팬으로 만들기도 했다. 클러치 히터였던 그는 팀이 필요할 때 꼭 안타를 치거나 볼넷을 골라냈다. 준수한 외모에 깔끔한 매너까지 우상이 될 만한 조건을 갖췄다.
올해 그라운드엔 그가 없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선수가 비단 그뿐이겠는가. 사상 첫 2000안타를 때려냈던 양준혁도, 왼손 투구의 달인이었던 구대성도 없다. 안경현 김종국 홍세완 최기문 등등. 그라운드를 땀으로, 눈물로 적셨던 이들은 이제 매년 발행되는 야구 연감 귀퉁이에 이름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들의 빈자리는 이미 다른 선수들이 채우고 있다. 매 경기마다 그라운드는 새로운 영웅을 토해내고, 영웅은 팬들의 마음을 적신다.
어릴 적 마음이 가고 눈길이 갔던 선수는 잘생기고, 잘 치는 선수였다. 이른바 스타플레이어다. 하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체구도 작고 열심히 하는데 성적도 도통 나지 않는 선수에게 관심이 간다. 수비 하나만 잘하는 대수비 요원이나, 땜질용으로 선발 등판한 선수 등에 더 정이 간다. 세월의 무게가 그렇게 만들었나보다.
지난겨울부터 문득문득 가슴속을 파고드는 시구가 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한용운의 <님의 침묵> 중 한 구절) 뚜렷한 이유는 없다. 그냥 머릿속을 한동안 맴돌다 사라진다. 내가, 혹은 우리가 보낼 수 없는 건 어릴적 우상이 아니라 그 우상에 열광했던 젊은 나, 혹은 우리의 청춘이 아닐까.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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