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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야구·MLB

도통 알 수 없는 ‘제주소녀 야구앓이’

등록 2009-10-27 20:44





김양희 기자의 맛있는 야구 /

20년 묵은 일기장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를 아우르는 세월의 눅눅함이 배어 있다. 일기장 안에는 ‘누가 미워 죽겠다’든가 ‘왜 삶은 이리도 짜증나는가’까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리고 한쪽에는 그날의 프로야구 결과가 촘촘히 적혀 있다. 조잡한 글씨로 ‘△△△가 홈런을 쳐서 좋다’ 혹은 ‘○○○ 파이팅!’ 식의 코멘트도 달려 있다. 제주도 소녀는 만화를 보고 싶어하는 여동생의 간절한 눈망울을 애써 외면하면서 야구를 시청했고, ‘크면 꼭 저 야구장에 가볼거야’라는 꿈을 키웠다. 대학 시절 잠실야구장 한편에서 홀로 들이켰던 캔맥주는 정말 짜릿했다.

누군가 물었다. ‘야구가 왜 좋냐’고. 어린 시절에는 몰입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는 게 좋았다. 가슴이 쿵쾅쿵쾅대는 긴장감이 있어 좋았다. 그리고 뒤지고 있더라도 막판에는 역전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어 좋았다. 9회말 2사까지 시계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다. 그저 온갖 확률 속에 점수를 내기 위한 선수들의 치열한 몸짓을 바라보며 즐기면 되는 거였다.

머리가 굵어진 뒤 야구 현장을 누비면서는 선수들의 땀이 좋았다. 선수들은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면서 수만 번 공을 던지고, 수천 번 방망이를 휘두른다. 그런 과정에서 팔은 휘어지고 어깨·무릎 인대가 너덜너덜해지기도 한다. 건장한 청년처럼 보이지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속병을 앓는 선수들이 많다. 자신의 몸과 싸우는 그들의 정신력에 때론 존경심이 생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야구처럼 온갖 감정이 뒤엉키는 스포츠도 없다. 중간에 대타로 바뀌지 않는 한 최소 3차례는 돌아오는 타석에서 타자가 한 번만은 쳐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못 쳤을 때는 ‘다음번에는 잘할 거야’라는 기대감을 품는다. 마지막까지 삼진으로 돌아설 때는 실망감에 ‘다신 응원 안 할 거야’ 다짐하면서도 기어이 다음날에는 또다시 그 선수와 팀을 응원하게 된다. 가까운 지인에게 실망하면 며칠, 몇달은 가건만 야구 팀만은, 야구 선수만은 왜 그리 쉽게 용서하고 믿음을 갖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2009 프로야구가 끝났다. 장장 8개월 동안 이어진 일일드라마가 최고의 시청률로 마감된 듯한 느낌이다. 스스로 다짐해본다. 내년 시즌에는 ‘7번’ 등번호가 새겨진 유니폼을 아들에게 입히고 야구장을 찾아야겠다고. 그리고 “저 선수가 엄마 어릴 적 영웅이었어”라고 말해줘야겠다고.

김양희 기자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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