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프로기사회 회장인 양건 9단이 지난 8일 한국기원 앞에서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국기원이 ‘미투 사건’을 법률적 시각으로만 접근하면서 피해자에게 이중의 고통을 주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한국기원은 지난 4월 헝가리 출신의 코세기 디아나 초단이 국내 프로기사에게 2009년 성폭행을 당했다는 ‘미투 고발’ 이후, 한국기원 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현직 검사가 조사 보고서를 주도적으로 만들었다. 이 보고서는 이달 한국기원 이사회까지 통과됐다.
하지만 조사 보고서 내용이 알려지면서 피해자에게 ‘2차 폭력’을 느끼게 할 질문이 이뤄졌다는 점이 드러났고, 한국기원 기사회 소속 프로기사 223명은 조사 내용에 반발해 서명운동을 통해 보고서 재작성을 요구했다.
실제 윤리위 조사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청바지를 벗기가 힘들다’ ‘사건 다음날 함께 놀러 갔다’ ‘노래방에서 춤을 진하게 췄다’ 등의 대목이 여럿 나온다. 그런데 윤리위는 이런 상황의 맥락을 묻는 질문을 하면서, 미투 고발자인 디아나 기사를 상대로 검사가 피의자 심문하듯 질문을 했다. 소속 회원들의 어려움을 듣고 어루만져야 하는 문화단체인 한국기원의 기본적인 소임보다는 미투 고발자에 대해 법률적 조사에 치중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디아나 기사가 2009년 자신의 처한 어려움을 헝가리의 오빠에게 보낸 이메일을 전문이 아닌 일부분만 제출했다는 이유로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한국기원 쪽에서는 “양쪽 입장이 첨예하게 다른 상태에서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기 위해, 최대한 엄정하게 조사를 하려고 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기사회 대의원들의 반발로 가해자로 지목된 김성룡 9단이 제출하려고 했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국땅인 한국에 바둑을 배우러 온 외국 여성이 겪었을 어려움을 좀더 고려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 집행부의 실력자로 한국기원의 실세로 꼽히는 송필호 부총재에 대한 비판도 커지고 있다. 송필호 부총재는 새로운 집행부 구성 이후 홍석현 총재를 대신해 한국기원을 이끄는 실질적인 책임자다. 하지만 최근 불거진 미투 보고서 논란과 한국기원 안팎의 불협화음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대신 유창혁 한국기원 사무총장이 11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사회까지 통과된 미투 보고서이기는 하지만 기사들의 반발이 심하고, 피해자를 존중한다는 미투 정신에 따라 보고서 재작성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24일 임시 운영위원회를 열어서 윤리위 보고서 재작성 관련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프로기사회도 디아나 초단의 미투 보고서 재작성뿐만 아니라 새 집행부 등장 이후 불거진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해 29일 기사총회를 연다. 기사회 총회에서는 집행부 퇴진 등이 안건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만약 기사회에서 현 집행부 불신임이 결의된다면 한국기원은 적잖은 내홍에 시달릴 전망이다.
김창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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