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단 동기 맞수 이세돌 9단을 꺾고 국수전 3연패를 달성한 조한승 9단이 21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스튜디오에서 양손에 흑백의 바둑돌을 쥐어 보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국수전 3연패’ 조한승 9단
“복잡함보다 단순한 게 좋아
포석 좋은 덕에 과찬 들어”
연구 잘 안한다는 평가엔
“노는 것도 다 공부다” 호기
도장 열어 후배양성 계획도
“복잡함보다 단순한 게 좋아
포석 좋은 덕에 과찬 들어”
연구 잘 안한다는 평가엔
“노는 것도 다 공부다” 호기
도장 열어 후배양성 계획도
제57기 국수전 도전5번기 제4국이 끝난 13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 입단 동기인 조한승(32) 9단과 이세돌(31) 9단의 복기가 1시간30분을 넘겼다. 복기의 끝 무렵 이세돌은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다 할 전투도 없었고 신묘한 수도 없었다. 그런데 조한승은 이세돌의 막강한 공격력을 봉쇄하며 261수 만에 흑 불계승을 거두고 종합전적 3-1로 국수전 3연패에 성공했다.
조한승에게는 이세돌 같은 막강한 공격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창호처럼 강력한 끝내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조한승의 바둑에는 깊은 맛이 있다. 김영삼 9단은 “조한승의 바둑은 깔끔하고 정갈한데, 그렇다고 싸움에서 약한 것도 아니다. 요즘 바둑은 초반부터 치열한데 조한승은 유장한 맛이 있다는 점에서 ‘품격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평했다. 선비처럼 모양이 반듯하고 유연한 조한승의 수는 모난 데도 없고 거칠지도 않지만 한칸, 두칸 턱턱 띄어 큰 곳을 차지한다. 찌르는 듯한 아픔은 없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조한승의 수대로 반상이 다스려지고 있다. 동료 기사들은 일본에 ‘바둑의 미학’ 오다케 히데오가 있다면 한국에는 ‘바둑의 품격’ 조한승이 있다고 한다.
21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 사옥에서 조한승을 만났다. 겸손한 듯 수줍은 것 같으면서도 목소리는 분명하고 힘이 있었다. 조한승은 “포석의 모양이 좋고, 복잡한 수보다는 단순하게 두는 편이어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 같지만 과찬”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조한승은 “전투보다는 타협하거나 쉽게 처리하는 수를 둔다. 하지만 일단 바둑을 두는 이상 이기려고 열심히 둔다”고 말했다.
얼핏 보면 조한승은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한 걸음 비켜 있는 느낌도 준다. 조급해하는 법이 없고 작은 승부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이세돌과의 국수전 결승 5번기에서 2연승을 거둔 뒤 3국에서 반격을 당했을 때에도 조한승은 “이제는 내가 쫓기는 입장이 됐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조하지는 않았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당연히 우승은 하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집착하지는 않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긍정적인 성격이 때로는 약점이 되기도 했다. 조한승은 후반에 형세를 낙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서 유리한 바둑을 막판에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2%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다. 조한승은 “과거에(2005년) 3개 기전에서 연속으로 4강에서 패한 적이 있는데 전부 내가 조금 유리하거나 비슷한 상황에서 너무 낙관적으로 보다 패했다”고 아쉬워하면서도 “그렇게 패하면 아프긴 하지만 내 성향 자체를 바꿀 순 없기 때문에 차라리 빨리 잊고 다음을 생각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평소 조한승은 바둑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기사로 유명하다. 그는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편인 것은 맞다. 하지만 나는 노는 것도 다 공부라고 생각한다”며 특유의 호기로움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바둑을 대하는 조한승의 태도는 매우 진지했다. 조한승은 “지금 바둑이 스포츠화돼가는 추세인 것은 분명하지만 바둑은 예전부터 예와 도를 중시했다”며 바둑의 정신을 강조했다. 조한승은 “바둑은 상대방과 얼굴을 맞대고 겨루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 중요하다. 결과보다도 과정을 중시하는 자세는 바둑 고유의 전통이고 이런 장점을 살리면서 스포츠로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바둑에 대한 조한승의 진지한 태도는 스승 이관철 4단에게 영향을 받았다. 한국 바둑계가 강남의 권갑용 문하와 강북의 허장회 문하로 양분되어 있던 1990년대 조한승은 어느 도장에도 속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젊은 정상급 기사였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10살부터 이 사범 밑에서 바둑을 배운 조한승은 스승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1년 넘게 스승의 집에 내제자로 들어가 13살 어린 나이에 입단에 성공했다. 조한승이 기억하는 이 사범은 “재미있고 유머 감각이 풍부한 분”이지만 “바둑 앞에서는 엄격”한 스승이었다. 문하생들이 바둑돌로 알까기를 하는 등 장난을 치면 호되게 혼을 냈고, 바둑판 위에는 바둑돌 이외에 아무것도 올려놓지 못하게 했다. 이 사범은 조한승에게 바둑 하는 사람으로서 바둑판과 바둑돌을 귀하게 다뤄야 한다고 배웠고,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고 존중해야 한다고 배웠다. 이런 가르침과 스승의 집에서 함께했던 생활들은 알게 모르게 조한승의 바둑에 영향을 미쳤다.
조한승은 자신이 받았던 가르침을 이제 후배들에게 전수하려고 한다. 그는 올해 김주호 9단, 한종진 8단과 함께 바둑도장을 열기로 했다. 조한승은 “지난해 성적이 좋지 못했고 나태해진 점이 있어서 나 스스로를 다잡는 의미도 있고, 내가 가진 바둑의 경험과 기력을 재능있는 사람에게 전해주고 싶어서 함께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조한승은 “주변에서 우려하는 분도 있긴 한데 바둑을 가르치는 일이 승부에 악영향을 미치기보다는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며 “올해는 좀 바빠질 것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허승 기자 rais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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