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승부 가르는 최소단위 승리
무승부 막는 장치로 도입돼
마지막 순간까지 승패 장담 못해
승자들 ‘치밀한 끝내기’ 호평받고
패자는 ‘가장 아픈 기억’으로 꼽아
무승부 막는 장치로 도입돼
마지막 순간까지 승패 장담 못해
승자들 ‘치밀한 끝내기’ 호평받고
패자는 ‘가장 아픈 기억’으로 꼽아
‘반집’.
바둑에만 존재하는 이 가상의 수는 불확실성의 징표이자, 최소 단위의 절대수다. 가로 세로 19줄 위의 361개 좌표점에서 나오는 무한대의 판은 0.5집을 기초로 승패가 갈린다. 선착하는 흑은 먼저 두는 이점 대신 6.5집을 공제하는데, 이때 반집은 무승부를 막는 장치다. 천변만화의 바둑은 바로 반집 때문에 더 미묘하다. 승자와 패자의 희비의 농도뿐만 아니라 보는이의 긴장감도 높아지게 된다. 반집으로 이기나 만방으로 이기나 승패의 결론은 같다. 때문에 반집을 정확히 계산해낼 경우 아예 돌을 던지는 경우도 있다. 10월25일 중국 베이징 중국기원에서 열린 한·중·일 삼국의 15회 농심신라면배 판팅위-강동윤 9단 대국이 한 사례다. 중국의 판팅위 9단은 반집 패배임을 확신하자 끝까지 두기보다는 강동윤 9단한테 돌을 던졌다. 왜?
■ 자존심에 판을 건다 반집 승부에서 돌을 던지는 것은 부담이 크다. 실제로 계산 실수로 반집 이기는 바둑을 반집 지는 것으로 착각해 돌을 던진 사례가 종종 나온다. 이럴 땐 돌을 던진 프로기사가 비난을 받게 된다. 그래서 프로 기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반집 승부라면 끝까지 두고 계가까지 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판팅위의 경우처럼 예외는 있다. 김만수 8단은 이를 심리적인 부분으로 설명했다. “보통 반집 차이는 끝까지 가게 마련이지만, 어린 시절 이창호나 이세돌처럼 자기 바둑에 대한 확신이 있고 계산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 정상급 기사들은 반집 승부에서 돌을 던져 자존심을 지킨다.” 농심배 한국대표팀 주장인 최철한 9단은 “어리고 패기 넘치는 판팅위가 이미 진 바둑을 계가하기보다는 돌을 던져 자기 바둑에 대한 자신감과 패기를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혹시나 하는 운을 바라며 진 바둑을 붙잡고 있는 것은 17살 패기 넘치는 소년 기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것 같다. 이날 바둑은 200수 넘게 두어졌을 때도 판팅위가 10집가량 앞서는 형국이었다가 막판 뒤집어졌다. 판팅위가 더 아팠을 것으로 보인다.
■ 반집의 지평 넓힌 이창호 판팅위가 반집 패배를 읽어낸 배경에는 이창호로부터 시작된 현대 반집 바둑의 축적물이 있다. 1930년대 말 일본 본인방 기전에서 흑 4집을 공제했고 이후 무승부 폐단을 막기 위해 반집 개념을 도입한 이래 다섯집 반, 여섯집 반으로 공제 폭은 확대돼 왔다. 그런데 이창호가 등장하기 전인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반집 승부는 ‘운’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강했다. 그렇게 정밀하게 수를 읽기는 힘들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창호가 ‘반집을 이기는’ 대국을 자주 보여주면서 반집 승부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한국기원 기사회장인 최규병 9단은 “이창호가 정밀한 계산 바둑을 통해 연거푸 반집승을 거두자 대중들 사이에서도 반집 차이가 운이 아닌 실력 때문이란 인식이 널리 확산됐다”고 말했다. 최 9단은 “과거 조훈현 9단의 시대까지만 해도 수읽기와 전투력이 가장 중시됐다. 그러나 이창호 9단이 등장하면서 끝내기, 계산력, 종반에서의 치밀함 같은 것들의 중요성이 새롭게 조명됐다”며 “이창호가 세계 바둑계에서 종반의 지평을 넓힌 영향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창호는 반집의 계산력으로 ‘신산’(神算)이란 별명을 얻었다. 판팅위는 물론 이창호의 영향력 아래에서 자란 한·중·일의 젊은 기사들은 모두 수준급 계산력과 치밀한 끝내기를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다.
■ 반집 승부의 고통 판팅위를 물리친 강동윤은 “보통 형세가 기울면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있는 반면 반집 승부의 경우 승패가 결정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에 결과가 나온다. 그래서 패한다면 다른 대국보다 더 아프다”며 반집 승부의 냉혹함을 전했다. 반집을 앞서고 있을 때 끝까지 유지하는 것도 힘들다. 최철한은 2011년 55회 국수전 결승 최종 5국에서 조한승 9단한테 진 것을 가장 아픈 기억으로 꼽았다. 최철한은 “그대로 마무리하면 내가 반집 앞서는 경기였다. 그러나 야구로 치면 내 바둑에는 오승환이 없었다. 종반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7~8회에도 대량 득점을 하려고 하다 보니 상대에게 역전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회상했다. 최철한은 결국 1.5집 차이로 우승을 넘겨줬는데, 반집 우세를 지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최철한 9단은 “박영훈은 반집 승부까지 가고 싶지 않은 기사다. 그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며 현재 최고의 반집 승부사로 박영훈을 꼽았다.
허승 기자 rais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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