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지배 등 세계대회 잇달아 참패
침체 극복위해 상시 대표팀 꾸려
승강제 도입된 리그전 시도 눈길
자발적 참여 유도 등 과제도 많아
침체 극복위해 상시 대표팀 꾸려
승강제 도입된 리그전 시도 눈길
자발적 참여 유도 등 과제도 많아
인적 자원의 열세를 시스템으로 개선한다?
한국 바둑이 상시적으로 대표선수를 가동할 수 있는 ‘국가대표 상비군제’를 시행한다. 올해 들어 만리장성에 포위돼 이렇다 할 힘을 쓰지 못하는 위기상황의 타개책이다. 한국 프로바둑 사상 처음이다. 양재호 한국기원 사무총장은 “6월 열린 엘지(LG)배 16강전이 결정타였다”며 상비군제 도입 배경을 밝혔다. 엘지배 참사로 명명된 당시 16강전에서 한국 기사 6명은 모두 져 8강에 한명도 진출하지 못했다. 기사의 층이 두터운 중국세를 뚫기 위한 집단적 지혜 모으기다.
한국은 그동안 아시안게임 등 국제대회를 앞두고 한시적으로 대표팀을 운영한 적은 있다. 하지만 상비군은 아니었다. 한국기원은 상위 랭커 11명, 영재 10명, 여자기사 9명, 다음주 선발전 통과자 10명 등 40명으로 상비군을 구성한다. 선발된 대표는 랭킹 순대로 A~D, 4개 조로 나눠져 조별 특성에 맞게 공동 연구와 대국을 편다. 이창호, 이세돌 9단은 빠졌지만 박정환, 김지석 9단 등 정예들이 합류했다. 이홍렬 9단과 안조영 9단이 감독을 맡고 박승철 7단이 코치다. 자체 리그로 매주 화요일 대국을 벌이는데, 9번 대결이 이뤄지면 조별 상위 3명과 하위 3명이 승격과 강등을 하는 승강제다.
■ 공동연구의 기틀 마련 양재호 사무총장은 “중국 바둑의 성장을 보면서 우리가 약한 부분은 영재 육성과 공동 연구라고 판단했다. 대표팀은 어린 기사들은 물론 정상급 기사들에게도 공동 연구를 할 수 있는 장이 되고, 영재들이 체계적인 지도 아래 성장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국 바둑은 전통적으로 자율성과 개성을 중시해왔다. 중앙집약적으로 기사들을 육성하기보다는 자신의 적성과 취향에 따라 연구하고 실력을 키워왔다. 이런 전통이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과 같은 천재들이 탄생하는 바탕이 됐다. 하지만 이제는 천재의 등장만 기다리지 않고, 체계적인 영재 육성도 병행하게 된다. 안조영 감독은 “한국 바둑의 전통인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어느 정도 규율을 만들어 성과를 낼 생각이다. 특히 영재기사들에게는 강도 높은 훈련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승철 코치는 “과거에는 충암연구회라는 바둑 연구 모임이 있었고, 젊은 기사들이 모여 연구하고 리그를 벌이면서 긍정적인 효과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 팬들에게는 또 하나의 리그 공동 연구는 대표팀 이전에도 한국기원이 주도한 바둑연구회를 통해 이뤄져왔고 최철한, 박영훈, 조한승, 이영구 9단 등 정상급으로 구성된 기술위원회가 영재기사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이번 대표팀은 이런 틀들을 더 체계화한 것이다. 오히려 주목할 부분은 승강제가 도입된 리그전이다. 양재호 총장은 “이 리그전을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지 않고 제대로 된 리그전으로 만들기 위해 스폰서를 섭외하고 있다. 최소 2억에서 최대 5억원의 예산이 투입될 것이다. 리그전이 발전할 경우 현재의 바둑리그와 함께 양대 리그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 꿈은 크지만, 성과는 미지수 국가대표 상비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세계대회에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는 바둑의 특성상 다른 스포츠 종목처럼 국가대표에게 국제대회 출전권을 주는 것도 아니어서 국가대표의 정체성이 약하고 정상급 프로기사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들 유인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 천야오예, 판팅위 같은 일류 기사도 합숙 훈련을 하는 중국의 풍토와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의 한국 바둑에서 기사들에게 타율적 체제를 강제하기 어렵다는 측면도 있다. 기술위원을 맡으며 한국 바둑에 많은 기여를 해왔지만 이번 대표팀에는 참여하지 않은 최철한 9단은 “취지에는 공감을 하지만 일정이 너무 많아서 대표팀 참여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강제적으로 일정에 따라야 하는 것도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허승 기자 rais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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