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보르도에서 열린 ‘유럽바둑 콩그레스’ 참가자들이 거리에 앉아 바둑을 두며 즐기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55년 역사 ‘바둑 콩그레스’ 열려
탈락해도 끝까지 함께 즐겨
참관 유창혁·남치형 “바둑천국”
탈락해도 끝까지 함께 즐겨
참관 유창혁·남치형 “바둑천국”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유럽의 바둑 애호가들은 2주간 바둑 삼매경에 푹 빠져든다. 실력에선 하수일지 몰라도 이미 그들은 독특한 ‘대국 문화’를 갖고 있다. 산 깊은 곳에서 새소리를 벗 삼아 바둑을 두고, 때로는 맥주와 와인을 홀짝거리며 바둑돌을 놓는다. 대국이 끝나도 또 바둑이다. 복도에서, 식당에서, 잔디밭에서 두런두런 둘러앉아 함께 복기를 한다. 일부는 아시아에서 온 고수를 찾아 다니며 지도기를 청한다.
지금 프랑스 보르도에선 한바탕 ‘바둑 쇼’가 펼쳐지고 있다. 지난달 23일 개막한 유럽 최대 바둑 대회 ‘유럽바둑 콩그레스’가 5일까지 열린다. 유럽 전역을 돌며 매해 열리는 대회는 55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축제의 성격이 강해 전세계 바둑 대회 중 가장 흥겨운 이벤트로 꼽힌다. 한국기원 이사 자격으로 현장에 다녀온 유창혁 9단과 남치형(초단)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는 “마치 바둑 천국에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올해는 메인 토너먼트 참가자만 800여명. 지난해 핀란드 탐페레에서 열린 54회 대회에 견줘 100명 이상 늘었다. 특히 올해는 예년과 달리 젊은 여성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남 교수는 “해마다 대회에 참가하다 보면 유럽에서의 저변 확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며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온 이들도 많아 대회가 열린 보르도 대학가 주변은 1000명이 넘는 사람들로 항상 붐볐다”고 말했다.
유럽바둑 콩그레스의 가장 큰 특징은 성적에 관계없이 참가자 모두가 축제처럼 바둑을 즐긴다는 것이다.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어린이부터 여든을 눈앞에 둔 할아버지까지 반상을 사이에 두고 평화롭게 수담을 나눈다. ‘바둑 선진국’인 한·중·일엔 대국이 ‘승부’에 가깝다면 이들에겐 ‘놀이’의 성격이 짙다. 그렇다고 마냥 즐기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주변은 흥겨움으로 가득하지만 막상 대국이 시작되면 진지해진다. 10급 이하 하수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30분 넘게 장고를 한 뒤 돌을 놓는다. 남 교수는 “보통 한국 아마 대회의 경우 1판을 두는 데 30분 남짓 걸리지만 이곳에선 2시간은 기본”이라며 “그 열정이 놀랍고, 또 부러웠다”고 말했다.
유 9단은 현장에서 인기 만점이다. 한 수 배우려는 어린이와 청년들이 몰려다닌다. 유 9단은 18살 프랑스 청년과 지도바둑을 뒀는데 예사롭지 않은 실력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는 “유럽에선 바둑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열악해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혼자 터득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수준급의 실력을 갖춘 이들이 많았다”며 “한국 같은 환경에서 배운다면 입단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대회 진행 방식 면에선 한국이 오히려 배워야 할 점이 많다. 유 9단은 “우리는 아마든 프로든 한 번 지고 나면 다 떠나 대회가 썰렁하지만 여기에선 꼴찌도 첫날부터 보름 동안 남아 축제를 함께한다”며 “바둑 실력은 우리가 월등할지 몰라도 대회를 즐기는 문화는 저들이 고수”라고 말했다.
김연기 기자 ykkim@hani.co.kr
유럽 바둑의 역사 19세기 후반 독일서 첫 바둑책 나와 유럽 바둑은 역사가 100년을 훌쩍 넘는다. 미국의 바둑 잡지 <엔클레이브>(ENCLAVE·영토)에 실린 ‘유럽 바둑의 역사’를 보면 19세기 후반 독일의 화학자 오스카어 코르셸트가 유럽에서 처음으로 바둑책을 펴내면서 바둑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도쿄의 대학에서 화학을 가르치며 바둑을 접한 그는 귀국 뒤 바둑 보급에 앞장섰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의 바둑 인구도 차츰 확대되기 시작했다. 보급 초기에는 과학자와 엔지니어 등 전문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으나 1911년 첫 영문 바둑책 보급 이후 지평을 넓혀갔다. 독일은 유럽 바둑 역사에서 선구자적 구실을 해 왔다. 1930년 무렵 가장 먼저 바둑협회를 꾸렸다. 독일에 이어 영국(1953년)에 바둑협회가 창설되고 이듬해 유럽바둑연맹이 꾸려지면서 유럽 전역으로 바둑이 퍼져나갔다. 프랑스는 두 나라에 견줘 상대적으로 늦은 1970년 바둑협회가 생겼지만, 가장 활발한 보급 활동으로 바둑 보급의 주도적 구실을 맡아왔다. 당시 프랑스 특유의 ‘살롱 문화’와 기묘하게 어우러지면서 파리에만 지금의 기원과 같은 바둑클럽이 수십개 생겨나고 회원 수도 급격히 늘었다. 프랑스는 이런 열풍에 힘입어 1974년 유럽바둑 콩그레스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부터는 체스 열풍과 맞물리면서 러시아가 바둑 강국으로 떠올랐다. 현재 유럽의 바둑 인구는 20만명 수준으로 추산되는데 이 중 절반인 10만명이 러시아인이다. 1970년대 10개에 그쳤던 유럽바둑연맹 회원국 수는 2010년 현재 40여개로 늘었다. 김연기 기자
유럽 바둑의 역사 19세기 후반 독일서 첫 바둑책 나와 유럽 바둑은 역사가 100년을 훌쩍 넘는다. 미국의 바둑 잡지 <엔클레이브>(ENCLAVE·영토)에 실린 ‘유럽 바둑의 역사’를 보면 19세기 후반 독일의 화학자 오스카어 코르셸트가 유럽에서 처음으로 바둑책을 펴내면서 바둑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도쿄의 대학에서 화학을 가르치며 바둑을 접한 그는 귀국 뒤 바둑 보급에 앞장섰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의 바둑 인구도 차츰 확대되기 시작했다. 보급 초기에는 과학자와 엔지니어 등 전문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으나 1911년 첫 영문 바둑책 보급 이후 지평을 넓혀갔다. 독일은 유럽 바둑 역사에서 선구자적 구실을 해 왔다. 1930년 무렵 가장 먼저 바둑협회를 꾸렸다. 독일에 이어 영국(1953년)에 바둑협회가 창설되고 이듬해 유럽바둑연맹이 꾸려지면서 유럽 전역으로 바둑이 퍼져나갔다. 프랑스는 두 나라에 견줘 상대적으로 늦은 1970년 바둑협회가 생겼지만, 가장 활발한 보급 활동으로 바둑 보급의 주도적 구실을 맡아왔다. 당시 프랑스 특유의 ‘살롱 문화’와 기묘하게 어우러지면서 파리에만 지금의 기원과 같은 바둑클럽이 수십개 생겨나고 회원 수도 급격히 늘었다. 프랑스는 이런 열풍에 힘입어 1974년 유럽바둑 콩그레스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부터는 체스 열풍과 맞물리면서 러시아가 바둑 강국으로 떠올랐다. 현재 유럽의 바둑 인구는 20만명 수준으로 추산되는데 이 중 절반인 10만명이 러시아인이다. 1970년대 10개에 그쳤던 유럽바둑연맹 회원국 수는 2010년 현재 40여개로 늘었다. 김연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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