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김장 보이콧’을 선언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먹는 사람도, 돕는 사람도 없는데 할 일만 많고 힘들다’는 이유였다. 처음엔 그리 서운하지 않았다. “사 먹는 김치 맛만 좋더라” 쓸데없는 소리 덧붙여 가며 오히려 엄마의 김장 탈출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엄마표 김장 김치가 없으니 식탁은 늘 앙꼬 빠진 찐빵마냥 허무했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김치를 다시 담그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불효도 그런 불효가 있어야지. 이 와중에 기적처럼 찾아든 물건이 ‘김치 밀 키트’다. ‘무슨 김치를 밀 키트로 만들어서까지 먹나’ 싶은 마음 반, 혹시 모를 마음 반에 직접 주문해 보았다. 마침 요리연구가 홍신애가 본인의 ‘평양식 육수 김치’를 밀 키트로 냈다는 소문을 들었다.
스티로폼 박스에 새지 않는 밀폐 김치 통, 단단히 포장한 절인 배추, 김치 양념, 육수가 들어 있었다. 김치를 버무릴 김장 매트와 완성된 김치를 누를 수 있는 밀폐 누름 독까지 완벽히 구비되어 있어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배추의 물기를 짜고, 김장 매트에 적당량의 김치 양념을 쏟아부었다. 시키는 대로 만들면 보장된 완제품이 나온다는 것이 밀 키트의 최대 장점이지만, 획일화된 맛을 낼 수밖에 없다는 데에서 늘 아쉬웠다. 하지만 이 김치 밀 키트는 달랐다. 내가 원하는 만큼 양념을 덜어내 배추에 비빌 수 있으니 ‘나만을 위한 김치’를 만들 수 있었다. 짠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양념은 약간만 묻히고 시원한 맛을 내기 위해 동봉된 양지머리 육수 두 봉을 모두 부었다. 다소 서툴렀지만 또 얼추 버무리다 보니 즐겁기만 했다. 커다란 배추 세 포기를 금세 ‘김치로 만든 뒤’ 냉장고에 넣고 나니 새삼 뿌듯했다.
바로 먹어도 맛있다는 말에 그날 저녁, 가족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 ‘나의 김치’를 올렸다. “어디서 난 김치냐”며 의심하던 엄마도, “네가 직접 담갔냐”며 당황하던 아버지도 “먹을수록 당기는 맛”이라며 썩 흡족한 눈치를 보이셨다. ‘이런 맛에 김장하는구나’ 싶은 효녀의 마음이 마구 샘솟았다. 백문영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