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란 아드리아, 마시모 보투라 등
‘예술’ 추구하는 유명 요리사들 늘어나
‘예술’ 추구하는 유명 요리사들 늘어나
먹거리를 작품 소재 삼은 예술가 한둘 아니야
요리사가 음식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건 논쟁거리
내공 있는 요리사들은 묵묵히 맛난 요리 추구 마시모 보투라도 언급해야겠다. 대표적인 모더니즘 레스토랑인 ‘오스테리아 프란체스카나’의 오너 셰프인 그는 넷플릭스에서도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다. 보투라는 구상주의 요리로 유명한데, 대표작은 ‘악! 레몬 타르트 떨어뜨렸어!’다. 이는 바닥에 철퍼덕 떨어진 레몬 타르트를 그대로 접시 위에 재현한 게 일품인데, 종종 더 심오한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그러니 다른 셰프들도 마찬가지지만, 보투라가 자기 레스토랑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컨템퍼러리 아트 작품들을 내놓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음식은 언제나 예술의 주제였다. 선사시대 벽화에 그려진 사냥 장면부터 로마의 프레스코화에 묘사된 파티의 향연, 16세기 밀라노에서 활동한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작품까지 말이다. 아르침볼도라는 화가는 과일이나 채소를 사용하여 초상화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먹거리를 재료로 사용한다는 게 아니다. 초상화에 양파가 당당히 등장해서 뺨을 대신한다. 곱슬거리는 앞머리는 마늘이, 입술은 소시지가, 머리는 무와 무청이 갈음한다. 괴기하다는 이도, 초현실적이라는 평도 있지만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뿐인가. 극사실주의로 과일부터 생선, 유리병에 맺힌 물방울까지 생생하게 표현했던 네덜란드 회화 장인들도 있다. 20세기 초반에 이탈리아의 미래파는 음식의 준비부터 소비하는 과정까지 그 자체를 퍼포먼스 예술로 승화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내 기억에 살바도르 달리도 침실을 빵으로, 그러니까 빵 침대에 빵 쿠션을 놓아 꾸몄던 것 같다. 아니면 내가 그냥 초현실주의 꿈을 꾼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셰프들이 레스토랑에서 먹을 수 있는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는 콘셉트는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일로, 이를 두고 논쟁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셰프들의 허세와 가식을 조롱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실 나도 종종 유머가 필요한 글에 이를 써먹곤 한다. 이 남자들(자기 요리가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요리사들은 죄다 남자다)의 자의식은 전세계 미디어의 지원사격을 받고 각종 상을 섭렵하면서 어마어마하게 부풀려진 상태다. 이들이 속해 있는 레스토랑 앞에 끝도 없이 늘어선 예약 대기 손님들과 대중 앞에서 이들을 찬양하는 열렬한 전도자들 덕분에 자신의 본분이 사람들을 먹이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것임을 잊은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그렇다보니 이제는 자신이 예술가도 아니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온 자애로운 신인 양 구는 이들도 있다. 예술의 정의는 언제나 논쟁거리였지만 이 글에서 당장 필요하니 내가 한번 정의를 내려 보겠다. 나에게 예술이란 인간성이나 사회의 한 측면을 반영한다거나 강조해야 하고, 아이디어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어쩌면 이야기를 전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음식이 이것을 할 수 있을까? 음식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어린 시절의 노스탤지어를 맛의 기억을 통해 소환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전통 음식의 재해석은 입도 즐거운 논쟁을 낳는다.(보투라는 볼로녜세를 재해석했다.) 하지만 음식이 지적 자극을 주고 인류사에 기여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셰프들도 있지만 난 “글쎄올시다”라고 해야겠다. 난 예술가로서의 야심을 드러내고 있는 이 셰프들을 맛집 글로벌 랭킹에서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다른 레스토랑 셰프들과 비교해보려고 한다. 내 경험상 날재료를 하나하나 고르고, 다듬고 가공해서 한 끼의 식사로 만들어내는 일은 진중하고 겸손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묵묵한 요리 장인들은 자기 요리 콘셉트가 어떻고 저떻다며 손님들에게 설명하느니 차라리 먹음직스럽고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데 공을 들인다. 이들은 접시 위에서 자신을 표현하려 애쓰지 않고 심오한 철학을 꼬치꼬치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 요리사들에게 자기 직업의 의미는 손님을 만족시키는 데 있으며 계절에 맞춰 최상의 맛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물론 이렇게 만들어낸 요리에도 이야기가 있고 예술적인 면도 있다. 식탁에 올라가는 식기류와 접시들, 레스토랑 인테리어, 계절에 맞는 식재료 등을 통해 이 이야기를 보고 듣고 먹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리 고도로 숙련되고 사려깊은 장인의 작품일지라도, 가장 와닿고 가장 좋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 낯설다. 아무리 열심히 예술이라는 틀에 끼워 맞춰 보려고 해도 합당한 것은 ‘장식예술’ 분야 정도가 아닐까. 그것도 극단적으로 짧게 반짝 빛을 보는 장식예술. 식탁에 올려서 입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단 몇분간만 즐길 수 있는 예술이니까. 손님들을 먹이고 만족시키는 것을 추구하는 셰프들의 작업을 평가절하하거나 폄하할 의도는 전혀 없다. 무엇보다도 접시 위의 아름다운 요리를 보면 이건 정말 멋진 조각 같군, 아니야 한 폭의 그림 같아, 아니 그림보다 더 나은걸 하며 감탄하게 되지 않는가? 최근에 유명한 런던의 갤러리에 간 적이 있다. 거기엔 기름 수영장, 쓰레기 더미, 슬리핑백까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이 현대예술이 일궈낸 성과를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허기가 졌다. 진정한 예술품을 만나고 싶은 허기가 아니라 정말로 배가 고파졌다고. 마이클 부스(푸드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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