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의 지하 묘지에는 사람의 미라와 더불어 여러 가지 동물의 묘가 있다. 주로 고양이, 개, 황소, 말처럼 인간의 삶과 인접했던 가축들이 인간의 묘와 분리되어 따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왕족의 묘실에는 그가 생전에 기르던 동물 모습을 벽화에 그려 넣거나 청동으로 본떠 남기는 경우도 있다. 장례 형식은 문명 간 차이는 있더라도 인간과 함께 묻힌 동물의 묘는 모든 문명의 흔적에서 곧잘 발견된다. 고대 신들이 반인반수의 모습을 하거나 전해져 온 괴담들 속 괴물들이 짐승의 속성을 닮아 있는 것 또한 인류가 동물의 모습에서 자연과 생명의 속성을 끊임없이 발견해왔음을 증명한다. 경이롭게 여기고 두려워하면서. 죽음을 단순히 목숨이 소멸하는 상태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으로 사유했던 고대인들은 그들의 왕이나 소중한 이가 죽었을 때 신이 인간에게 베푼 모든 것이 죽음에서도 이어지길 원했다. 그래서 신이 신의 모습을 나눠준 모든 것들을 인간과 함께 묻었다. 즉, 신은 자신의 성질과 성향을 인간에게만 나눠준 것이 아니다. 신은 동물에도 깃들어 있다. 어쩌면 사람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나는 코코를 보며 가끔 신의 사랑과 분노를 체험한다고 설득하기 위해 고대 이집트 이야기까지 꺼내며 인류학적 귀납법마저 동원한 것이다.
코코는 나의 개. 쓸쓸하고 찬란하신 나의 신이다.
귀엽고, 포근하고, 털이 많이 빠지고, 가족이 아닌 사람을 몹시 싫어하고, 간식을 내놓지 않으면 온 식구를 따라다니며 구슬프게 울어대는 신. 이 사랑스럽고 예민한 식탐 신은 약 십년 전 어느 봄날, 정말 우연히 내 삶으로 걸어들어왔다. 당시 알던 동네 동생이 빌라 주차장 입구에 손바닥만 한 강아지를 넣고 버려둔 종이상자를 발견했다. 그 강아지를 우리가 모여 놀던 공터로 데려왔다. 본인이 키우려고 했으나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고, 경찰서에 데려가니 삼일 안에 맡을 이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락사를 시킨다는 얘기에 속수무책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온몸에 카페라테를 잔뜩 묻힌 듯한 털에 주둥이만 새카맣고 흰 양말을 신은 듯 네 발만 총총 새하얀 강아지는 단연코 압도적인 귀여움으로 우리의 마음을 홀리고 있었다. 그러나 딱 봐도 애완견 품종은 아니었다. 성견이 되면 족히 중형견 이상의 크기로 성장할 것으로 보였다. 아무도 맡겠다는 이가 없었고, 나 역시도 자신이 없었다. 다른 친구들이 떠나자 동생의 부탁으로 어쩌다가 두시간 정도 그 강아지와 둘이서 공터에 있게 되었다. 같이 흙을 파며 놀다가 급기야 내 발등에 자리를 잡고 잠이 든 강아지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고 골반에 쥐가 나려던 찰나, 동생이 조악한 목줄을 들고 돌아왔다. 일단 공원에 묶어 놓겠다고. 누구라도 데려가지 않겠냐고. 나는 찜찜한 기분을 느꼈으나 마찬가지로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고 앞으로의 세월, 구박을 감당하며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어릴 적 학교 앞에서 할머니가 팔던 병아리와 토끼를 샀다가 일년도 안 되어 흥미가 떨어진 일도 있었다. 그 일로 절대 동물을 데려오지 말라는 부모의 엄포를 숱하게 듣지 않았던가. 더 참견했다가는 두시간짜리 애착이 이십년의 애증으로 변모할까 봐 모른 척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걸어갔다. 삼십분쯤 걸었을까. 큰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차들이 나를 향해 빵빵거리기 시작했다. 놀라서 차를 보니 어떤 운전자가 내 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목줄을 어떻게 끊었는지, 언제부터 따라왔는지 모를 커피색 흰 양말 강아지가 아주 해맑게 나를 보며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오다가 어디 개나리 화단에서 구르고 왔는지 등줄기에 노란 꽃잎을 잔뜩 묻히고서는.
신은 때로 꽃가루를 휘날리며 인간을 선택하고 자신을 섬기라고 명령한다. 이성적인 설명은 불가능하나, 사람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일과 비슷한 일이라고 얼추 납득할 수 있다. 그리고 신의 계시를 받은 자는 고통을 인내하고 신의 섭리를 관철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당시 사춘기를 지나는 중이었는지, 냉랭해서 가족들과 말 한마디 섞지 않던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로서는 거의 세계평화조약을 위한 거국적인 한걸음과 다르지 않았다. 동생에게 무턱대고 제안했다. 내 품에 강아지가 있다. 함께 키우겠냐고. 모든 핍박에 맞서 함께 싸우겠냐고. 동생은 흔쾌히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나와 동생이 최초로 이루어 낸 도원결의였다.
‘코코’라는 이름으로 결정하게 된 건 코코의 털이 연상하게 만드는 빛깔이 주요하긴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사람에게 버려진 강아지의 경우 새 가정에 잘 정착하기 위해서는 개가 알아듣기 쉬운 이름을 지어주면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받침이 없고 같은 모음으로 이루어진 두 글자. 한국 강아지 절반 이상이 ‘코코’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통계는 어쩌면 자신의 개가 사람을 편안하게 느끼길 원하는 한국인의 애정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나는 개에 대해서 닥치는 대로 공부했다. 산책하는 법. 배변 훈련하는 법. 집에 독립적인 공간을 만들어주는 법. 심장사상충 약을 주기적으로 먹여야 하며 특히 모기로 감염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여름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걸 알았다. 동물병원에 데려가서 코코의 품종을 ‘믹스’(mix)라고 적었다. 흔히 똥개라고 일컫는 ‘잡종’이라는 표현은 개를 비롯해 인종 차원에서도 멸시의 뉘앙스가 섞인 단어라는 것도 알았다. 인간이 종을 구분하려는 이유에는 종과 종 사이에 계급을 만들어내려는 욕망이 투사되어 있다.
내가 데려왔을 때 코코는 생후 2개월 정도였고, 종이상자에 트라우마가 있는지 상자만 보면 소파 밑이나 내 뒤에 숨어 떨었다. 모든 식구가 집을 비우는 날에는 외출하는 내내 코코의 울음이 들리는 것만 같아서 서둘러 돌아왔다. 그러면 휴지와 문틀과 벽지가 넝마가 된 집이 펼쳐졌다. 멋진 산책 방법을 몰라서, 산책을 할 때면 차도로 뛰어들까 봐 거의 절반은 안고 다녔다. 거리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침대에 누우면 자신도 옆에서 자고 싶다고 침대에 매달린 채 그렁그렁하게 쳐다봤다. 아침에 눈을 뜨면 코코는 내 목덜미를 목도리처럼 감고 꼬리로 팡팡 뺨을 때려 남은 잠을 깨웠다.
물론 서로 미워한 적도 있다. 몸이 자라면서 고집을 부릴 줄도 알게 된 코코는 털을 빗기거나 발톱을 자르거나 목욕을 시킬 때 종종 나와 동생을 물었다. 한번은 동생의 손을 심하게 물었다. 나는 침대 밑으로 숨은 코코를 끌어내 구석에 몰아넣고 신문지를 말아 바닥을 세게 내리치며 폭력적인 방식으로 한참 혼을 냈다. 끝내 코코가 떨면서 바닥에 오줌을 지렸고 한동안 내 곁에 오지 않았다. 나는 홀로 잠드는 침대에서 외로웠으나 괜한 자존심으로 코코가 얼씬도 못 하게 방문을 닫고 잤다.
자신의 개가 그 어떤 개보다 영특하다고 여기는 건 만국의 모든 반려인이 느끼는 공통의 착각이겠지만, 코코는 감정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느낄 정도로 똘똘했다. 여담이지만, 내 시집의 나오는 모든 개의 형상은 다 코코를 본떠 만들었다. 시를 쓰는 밤은 보통 위험한 우울을 건드릴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코코는 방문을 여는 방법을 터득해서 들어와 내 가랑이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고 나를 한참 물끄러미 보았다. 그 눈빛은 평소와 다른 눈빛인데 과장해서 보탠다면, 나는 그 눈빛에 몇 번이고 구원을 경험한 적이 있다. 심연의 어둠 속에서도 나를 지켜보는 코코의 맑은 눈빛이 보였던 것이다. 어디 가지 말라고. 거기는 아슬아슬하다고.
집안 사정으로 자의 반 타의 반 독립을 하게 된 나는 코코랑 떨어져 산 지 꽤 됐다. 이번 설에 본가에서 만난 코코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람 나이로 치면 할아버지에 가까운 코코는 새카맣던 주둥이가 하얗게 변했고 점프 높이도 조금 낮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나를 보면 구르고 뛰다가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반기고, 식구들과 의사소통을 할 정도로 보디랭귀지를 구사한다. 몇 번 물려 무섭다며 다른 데로 보내라던 엄마는 이제 코코의 밥그릇 앞에 쪼그려 앉아 아기에게 이유식을 먹이듯이 한 입 먹을 때마다 잘한다고 칭찬하고, 털이 많이 빠진다고 구박을 일삼던 아빠는 동생의 엄격한 통제를 피해 새벽마다 레지스탕스처럼 몰래 간식을 훔쳐 코코의 비만을 돕고 있었다.
코코가 내게 “바깥을 보고 싶으니 창문을 열어줄래?”라는 몸짓과 눈빛을 했는데 단언컨대, 저 문장의 물음표까지 정확하게 눈빛으로 구사하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거실 창문을 열고 코코와 쪼그려 앉아 한산한 골목을 오래 보았다. 봄 냄새가 났다.
그러나 나의 신이 내게 준 것 중 가장 큰 것은 애정이나 행복 같은 감정이 아니다. 나의 신은 내게 자신의 기다림을 주었다.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오라. 자신의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하염없이 현관을 바라보며 기다릴 것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오라. 국가가 사회의 약자를 대하는 실력을 보려면 그 사회가 동물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된다는 말을 조금 축소한다면,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려면 그가 그의 동물과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면 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나의 작고 기쁜 개에게서 소명을 받았다. 시인이고, 누군가의 자식이자 친구이며, 누군가의 연인이자 원수이기 전에, 나는 돌아가야 하는 사람이다. 나를 값도 없이 사랑해주는 자들에게로, 온통 상처로 채워진 영혼을 끌고서라도 기어코 돌아가는 일. 그 일을 평생의 업적으로 남겨야 한다는 소명을 주기 위해, 개는 신을 대신해서 사람의 세상으로 온 것이다.
최현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