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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차갑고 쫄깃한 추억의 맛, 먹다 남은 돼지껍데기

등록 2021-02-05 07:59수정 2021-02-05 09:24

맛이 좋은 술안주, ‘돼지껍데기’. 박찬일 제공
맛이 좋은 술안주, ‘돼지껍데기’. 박찬일 제공

음식은 결국 향이다. 혀가 아니라 코로 먹는다는 말이 있다. 감기로 코가 막히면 음식 간을 잘 보기 힘들다. 음식은 뜨거워야 맛이다. 과학적으로 그렇다. 열은 음식의 맛과 향이 잘 발산되도록 분자의 활동을 끌어준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이나 셔벗은 더 많은 설탕과 향을 넣어야 한다. 차갑기 때문에 혀가 맛을 잘 감지하기 어렵다. 물론 이런 빙과는 차가워서 가치 있으므로 다른 얘기가 된다. 뜨거워야 맛이라고 했는데, 너무 뜨거워도 문제다. 혀를 데일 정도로 뜨거우면 맛을 잘 못 느낀다. 화상 입은 혀는 미각을 잃어버린다. 국밥의 경우 100℃ 이상의 펄펄 끓는 뚝배기보다 80도 정도로 낮춘 뚝배기에 담았을 때 가장 맛이 좋다고 한다. 물론 뚝배기는 시각적으로 더 맛깔스럽고, 온도를 오래 보존해주기는 한다. 한 가지 더. 펄펄 끓는 음식은 짜게 먹게 된다. 간을 잘 감지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음식의 온도도 중요하지만, 물리적 촉각이나 질감 먼저 따질 때도 잦다. 아삭, 바삭, 쫄깃쫄깃 같은 식감이 맛과 향보다 우선인 경우다. 예를 들면 ‘돼지껍데기’ 같은 거다. 우리 나이대 사람들은 도시락을 쌌다. 반찬거리가 변변하지 못해서 어머니는 늘 애를 먹었다. 하루 최소 네개, 심하게는 여섯개를 쌌다. 학교에서 야간 학습하는 수험생은 저녁밥도 도시락으로 준비했다. 한번은, 반찬 통을 열었더니 고기반찬 비슷한 게 있었다. 하나 집어 들었는데, 덩어리째 딸려 올라왔다. 이게 뭐야? 생각해보니, 어머니가 전날 사오라고 했던 ‘돼지껍데기’였다. 사실, ‘돼지껍데기’는 요즘 같으면 거저 얻을 수도 있다. 고기를 넉넉히 사면 정육점 아저씨가 몇장은 그냥 주신다. 하지만 고기 귀하던 옛날엔 다 돈 받고 팔았다. 돼지고기란 이런 것이었다. 삼겹살이니 목살이니 하는 부위가 아니라 정육–비계–껍데기로 정해졌다. 어머니의 지갑 사정에 따라 바뀌었다. 정육은 아주 가끔, 비계는 그럭저럭, 껍데기는 언제든.

요즘은 껍데기에 비계를 붙여서 자르지 않는데, 과거에는 두툼하게 붙어 나왔다. 마포에는 껍질을 파는 술집이 흔했는데, 연탄불에 올린 껍데기를 구우면, 비계에 불이 붙어서 연기가 가게 가득 피어올랐다. 집에서는 대개 삶았다. 간장, 설탕, 마늘, 파, 미원을 넣었다. 조리용 술 같은 것 없었으리라. 아버지가 마실 술도 부족했으니까. 껍데기를 숭덩숭덩 잘라서 위에 양념을 뿌리고 푹 삶아 조리면 입에 ‘쩐득쩐득’ 붙는 게 기막혔다. 밥반찬으로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어머니가 이걸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는 것이었다. ‘돼껍’은 식으면 젤라틴이 굳으면서 처음에 썼듯이 전체가 서로서로 달라붙는다. 떼어먹어야 하는데, 이게 아주 묘했다. 질겅거리고, 씹기 힘들었지만 묘한 맛이 있었다. 달지 않은 젤리랄까. 고기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고기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술안주로 이게 요긴하다는 걸 시장에서 배웠다. 시장에 가면 좌판 술집이 많았다. 지금도 꽤 남아 있다. 광장시장이 그중 유명했다. 요즘 관광객 때문에 법석이지만 원래 수십년 역사를 가진 술꾼들의 전당이다. 이런 좌판에 가면 족발은 비싸니까, 껍데기를 비슷해서 조려 팔곤 했다. 차갑다기보다 그냥 상온에서 굳은 껍데기조림. 보통 맵게 요리해서 팔았는데, 나는 간장으로 달달하게 만든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오향을 넣으면 딱 족발 맛이겠다.

자, 그럼 만들어보자. 시장이나 동네 정육점에 가서 앞다리살 중에 껍데기 실한 쪽으로 요청한다. 살이 중심이 아니라, 껍데기를 원한다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그러니까 마트 같은 데서는 사기 힘들다. 의사소통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살점이 어느 정도 붙어 있게 마련인데, 너무 많으면 살점만 적당히 도려내어 김치찌개용으로 갈무리해둔다. 우리는 껍데기를 먹을 것이므로. 준비한 껍데기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자른다. 간장과 술(청주든, 요리술이든, 소주든)을 뿌리고 통후추와 마늘 정도만 넣고 물을 부어 오래 끓인다. 보들보들해지면 먹어보고 불을 끄고 식힌다. 상온에 두었다가 먹어도 되고, 냉장고에 넣어서 내일 먹어도 좋다. 나는 당연히 차가운 걸 노린다. 훨씬 쫄깃하기 때문이다. 껌처럼 씹어서 삼키고 술을 한잔 털어 넣는다. 어머니의 ‘돼지껍데기’ 도시락 반찬이 세월이 흘러 술안주가 되는구나. 착잡해지는 맛이다. 맥주나 소주, 청주, 중국술에 두루 어울린다. 파를 다져서 뿌리고, 춘장을 찍어먹는 멋을 부릴 수도 있다. 흔해서 만만해하던 것이 귀해지기도 하는 세상이다. 이 음식은 아직 내게서 이름을 얻지 못했다. 껍데기냉채? 껍데기조림? 그냥 ‘먹다 남은 껍데기?’ 무어라고 명명하든 이 대단한 쫄깃함은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파인 다이닝’의 셰프들이 가져다 쓸 수 있는 놀라움이 숨어 있다. 다른 무엇으로도 이 탱탱함을 대체하기 어렵다.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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