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천 지역 영화여행 출발지 애관극장. 이곳을 찾는 관객들은 극장에 얽힌 애틋한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옛날 신문’ 영화광고란에서 등장했던 ‘만원사례’가 관객이 가득 찬 ‘사례’(事例)가 있었다고 자랑하는 표현인 줄 알았다. 이를테면 ‘성공 사례’, ‘우수 사례’라고 할 때처럼 말이다. 최근에야 알았는데 관람객이 가득 차는 데 공헌한 배우, 스태프나 배급사 등의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의미로 봉투에 찻값이나 밥값 정도를 넣어서 사례(謝禮)하던 관행이 있었단다. 단관극장 시절의 이야기다. 어쨌거나 관객이 많이 든 것을 홍보하는 문구로 쓰였으니 맥락은 통한다.
한자의 음만 두고 뜻을 잘못 넘겨짚은 또 다른 ‘사례’가 있다. 길고양이 다큐멘터리 영화 <고양이 춤>(2011)을 만들었던 윤기형 감독은 올해 125주년을 맞는 인천 애관극장에 대한 다큐멘터리 <보는 것을 사랑한다>를 완성했다. 애관극장의 관은 ‘볼 관’(觀)이 아니고 ‘집 관’(館)이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많은 이가 극장 이름을 ‘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의미라고 해석해 왔다. 결국 ‘보는 것을 사랑하는 집’이라는 뜻이니까 그리 틀린 말도 아닌 듯해서 오역을 영화 제목으로 삼았단다.
보는 것을 사랑하는 집. 극장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표현이 있을까? 어떤 공간에 사람이 모이고, 무엇인가 반복해서 상영되면 거기에 감정이 깃든다. 그렇게 특별한 장소가 된 극장을 숱하게 떠나보냈다. 작은 독립예술상영관부터 멀티플렉스 체인 영화관까지 내일을 담보할 수 없는 요즘은 어느 극장에서 휴관을 알리면 영영 다시 가지 못할 것 같아 마음이 휑하다.
1972년 탁경란 대표 부친 탁상덕 사장이 애관극장 인수 당시의 모습. 사진 국가기록원 제공
지금은 사라진 극장이 전한 마지막 편지를 떠올린다. ‘중앙시네마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지만 영화처럼 좋은 나날이 펼쳐지길 바랍니다.’(2010년 5월30일 영업종료를 알렸던 명동 중앙시네마) ‘영화에 대한 시네코아의 짧은 입맞춤은 끝나지만 (중략) 사라지지만 지워지지 않는 시네코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2006년 4월24일 마지막 상영을 한 종로 시네코아)
부산 국도예술관(2018년 1월31일 휴관)의 마지막 한 달을 따라가는 박배일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라스트 씬>(2018)은 강릉 독립예술극장 신영이 휴관하던 무렵도 기록한다. 마지막 상영을 앞두고 관객 앞에 섰던 신영의 박광수 프로그래머는 “공간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이 공간과 이 공기에 고마웠다는 박수 한번 치고 시작합시다”라고 말한다. 극장이 마치 살아있는 친구, 함께했던 동료처럼 느껴진다. 신영은 돌아왔고, 국도는 아직 우리 곁에 오지 않았다.
쾌적함과 서비스가 극장을 고르는 중요한 기준이 된 시대다. 그 두 가지 조건 이외에 무엇을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극장의 의미가 뭘까? 나의 ‘극장’을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려본다면 헛기침, 웃음, 훌쩍임,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로 불편하고 가끔 아주 친밀하게 겹치는 관객들, 내 멋대로 해석한 영화 장면들, 팝콘 부스러기 정도가 될 것 같다. 이런 잡다한 것들이 뒤섞인 시간과 공간이 내겐 사적인 의미라고. 또 당신은 어떤지 묻는다.
동인천 지역에 남아있는 두 곳의 극장. 애관극장과 인천 미림극장에 다녀왔다. 이들의 전성기는 극장 흥행을 ‘천만 관객’으로 가늠하기 한참 전, 만원사례가 통용되던 시절까지였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버틴 두 극장에는 요즘 극장이 갖지 못한 이야깃거리가 있고, 멀티플렉스 체인이 넘보지 못하는 개성이 분명히 남아있다. 나도 애관극장과 인천 미림극장에 말을 건네 본다. 추억이라고 하면 과거로 흘려보내는 것 같아서 주저될 정도로 지금 꼭 붙들고 싶은 특별한 장소라고. 내일도 같이 있자고.
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
[ESC] “제가 한국의 시네마 천국 토토예요” 125년 애관극장 얘기
동인천 지역에 있는 애관극장
국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
‘신성일 엄앵란 쇼' 등 열렸던 그곳
지상렬·전무송 등 추억 가득한 곳이기도
내년 윤기형 감독의 다큐로 재조명 예정
애관극장 1관은 400석 규모로 2층으로 영화와 연극을 함께 올릴 수 있는 무대를 갖춘 구조다. 인천 시민들의 복합문화공간 역할을 했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동인천 지역은 한때 영화관이 19개나 있던 ‘시네마 천국’이었다. 지금 남아있는 극장은 중구 경동의 애관극장과 동구 송현동의 인천 미림극장뿐이다. 지난 3일. 125년 역사의 애관극장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한 윤기형(52) 감독을 만나, 동인천 지역을 타박타박 걸었다.
“대중잡지 <별건곤>(1920~30대 발행한 생활문화 잡지)에 소개된 애관극장 위치가 재미있어요. 바로 앞엔 답동성당이 있고, 왼쪽을 보시면 능인사가 있어서 성당 종소리와 불당 목탁 소리가 같이 들렸죠. 능인사 너머 용동권번(인천의 기생조합)도 있어서 근처 요릿집에서 장구 치는 소리까지 극장에 들렸죠.” 함께 걷다 경동 언덕길에 잠시 멈춰 선 윤기형 감독이 들려준 이야기에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1928년 8월 발행한 <별건곤> 15호에는 애관극장 있는 외리(현 경동)를 ‘세상이란 멋대로 지내는 것이라는 것을 한장에 그려놓은 표본’이라고 그려져 있다. 성당에서는 천당을 찬양하는 성가가 흘러나오고, 그 턱밑 요릿집에서는 인생 한 번이니 젊어서 놀자면서 떠들썩하며, 불당에서는 극락을 바라는 염불이 퍼지고, 극장에서는 미국 연애 영화를 상영하던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이질적인 요소가 뒤섞인 풍경은 지금도 여전하다. 노인 요양병원 여러 개 사이, 복고가 최신 유행인 시대에 맞춤한 카페들까지 들어섰으니 <별건곤> 기자라면 또 지면 한 바닥을 쓰고도 남았으리라.
애관극장 다큐멘터리를 만든 윤기형 감독.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인천 사람들도 여기가 한국 최초의 실내 극장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아요. 대단한 역사를 지닌 곳인데 그 흔한 기록영상물 하나 없는지 궁금했어요. 제가 애관극장 다큐멘터리를 찍게 된 계기죠.” 윤 감독의 말이다. 1895년 조선인 사업가 정치국이 운영했다는 실내 극장 협률사(協律舍)는 축항사라는 명칭을 거쳐 1921년부터 현재의 이름 애관으로 불렸다. 정치국의 협률사는 서울 정동의 협률사(協律社·1902년)보다 7년, 종로 단성사(1907년)보다도 14년 앞섰다. 근대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과 한국전쟁 시기를 지나 멀티플렉스 시대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애관극장은 올해 125주년을 맞았다.
노란색과 파란색의 페인트칠로 꾸민 애관극장의 첫인상은 까마득한 세월의 정취보다 좀 더 가까운 과거, 1990년대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곳이었다. 기대만큼 시간의 흔적이 남지 않은 것 같아 아쉽던 차, 윤 감독이 극장 옥상으로 안내했다. 관계자만 알 법한 문을 열고 좁은 계단을 오르니 맞은편에 답동성당 종탑이 보인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 때 함포사격으로 경동 일대가 폐허가 되었어요. 성당만 종교 건물이라 포화를 피할 수 있었지요. 극장이 무너진 자리에 임시 건물을 세워 영화를 계속 상영하면서 1954년 새로 지은 건물이 지금의 애관극장입니다. 그 당시의 환기구나 건물 안 골조가 남아있어요.” 올해 85주년을 맞은, 현존하는 유일한 단관극장인 광주극장도 1968년에 화재로 전소하여 다시 지은 바 있다. 유서 깊은 극장의 역사에는 이렇게 전쟁이나 화재로 인한 위기가 있었다.
1960년에 신문에 실린 애관극장 광고. 사진 윤기형 감독 제공
또 다른 위기는 멀티플렉스 극장 체인 시대의 개막이었다. 1999년 12월 인천 남동구 구월동에 국내 두 번째로 큰 규모의 14개관 보유한 ‘씨지브이(CGV) 인천’이 들어서면서 극장이 몰려 있던 동인천 지역에도 위기가 닥쳤다. 2001년부터 인천극장, 문화극장, 오성극장, 인형극장, 미림극장(이후 재개관)이 차례로 문을 닫았다. 애관극장 탁경란(57) 대표가 극장을 인수한 때는 2000년. 극장 사업을 하기엔 어려움이 많던 시기였다. 사무실에서 만난 탁 대표의 등 뒤에는 1972년부터 애관극장을 운영했던 부친 탁상덕 전 대표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탁상덕 대표가 돌아가신 후, 경란씨의 오빠들이 극장을 꾸리다 부도가 났고, 경매로 나와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갈 판에 막내딸이 극장을 되찾았다.
“아버지가 여러 사업을 하셨는데 전국에 있는 거 다 팔아도 애관극장은 팔면 안 된다고 생전에 자주 말씀을 하셨어요. 남편과 미국에서 논문을 쓰느라 한국을 잠시 떠나 있다가, 유지를 받들어 제가 인수를 했는데 막상 경영하려니 상황이 너무 안 좋았죠.” 탁 대표가 그때 만약 극장을 포기했다면, 애관극장의 역사는 끝이 날 수도 있었다. 다른 상업용도 건물을 짓거나 대기업 극장 체인이 인수했다면 ‘애관’이라는 이름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애관극장 1관은 400석 규모로 2층으로 영화와 연극을 함께 올릴 수 있는 무대를 갖춘 구조다. 인천 시민들의 복합문화공간 역할을 했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단관으로는 영화 배급을 받기도 어려웠어요. 애관극장에 다른 상영관을 더 만들면, 극장 운영을 지속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2004년도에 신관을 짓고 4개 상영관을 추가해서 멀티플렉스로 거듭났죠. 처음에 400석 2층 규모의 애관 1관을 쪼개서 상영관을 나누자는 제안도 많았어요. 좀 더 이익이 날 수 있었겠죠. 근데 저는 애관 1관을 살리려고 나머지 상영관을 지은 겁니다. 인천 시민의 복합 문화 공간 역할을 했던 1관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건 제 자부심이기도 해요.”
탁 대표를 통해 그간 애관극장의 내력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까닭도 들을 수 있었다. “취재나 촬영지로 사용하고 싶다고 요청은 많았는데 다 거절했죠. 그 관심이 독이 될지 아닐지 판단이 서지 않았어요. 극장의 역사가 외부로 알려지면 극장을 빼앗길까 두렵기도 했어요.” 극장 건물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 전에 소유주가 건물을 허무는 일이 있었다. 서울 국도극장과 스카라 극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탁 대표는 이목을 끌지 않고 조용히 영화만 상영하며 극장을 지키는 것을 택했다.
탁경란 애관극장 대표.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윤기형 감독도 6개월간 극장을 오가며 대표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촬영 허락을 얻었다. 지난 10월에 열린 인천 영상포럼 장소로 애관극장을 개방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윤 감독은 애관극장 옛날 기록 하나만 찾아도 기뻐서 껑충껑충 뛰는 사람입니다. 영상포럼 특별 상영으로 영화를 보고 큰 위안을 얻었어요. 극장의 역사가 125년이라면, 아버지가 계셨던 어린 시절부터 제가 함께한 시간은 50여년. 거의 제 평생인 거죠. 제가 어릴 때 나이 제한이 있어서 상영관에 들어가지 못해 못 본 영화는 영사실에서 영사기사님이 놓아준 의자에 앉아서 봤으니까, 그야말로 영화 <시네마 천국>의 토토와 같았어요.”
탁 대표는 지역 영화인들과 예술인들에게 극장을 개방한 영상포럼을 계기로 여러 행사를 유치하고 독립 예술영화 상영도 고려하고 있다. “저보다 애관극장을 사랑하고 더 멋지게 극장의 역사를 이어나갈 사람이 있다면 결혼시켜 보낼 마음도 있어요. 지킬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극장이 옛 사진 속 모습 그대로 복원되고 언젠가 개항로가 영화의 거리로 거듭날 때 그 중심에 애관극장이 있기를 바랍니다.”
애관극장 신관 오락실에서 만난 고전 게임 ‘보글보글’. 유선주 객원기자
자리를 옮겨 애관 1관으로 향했다. 코로나19로 1관은 고요했다. 2층 좌석에서 내려다보이는 무대에서 과거 피아니스트 레너드 번스타인이 내한공연을 했고, ‘신성일 엄앵란 쇼’가 열려 일대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으며 미스터 유니버스 선발대회가 열리기도 했단다. 윤 감독은 지정좌석제가 아니던 시절의 극장 추억을 들려주었다. “인천 사람들은 영화를 엔딩부터 봤어요. 자리를 빨리 잡으려고 앞 회차 상영이 끝나기 전에 들어간 거죠. 1987년께 서울에 있는 극장에서 지정좌석제를 경험하고 깜짝 놀랐어요.“
그의 다큐멘터리 <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내년 봄 전국 개봉을 기다린다. 다큐멘터리에는 애관극장을 추억하는 이들이 여럿 등장한다. 인천 출신 개그맨 지상렬은 애관극장을 ‘극장계의 조상님’이라고 한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불러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를 누렸던 가수 한명숙이 데뷔한 무대도 애관극장이었단다. 배우 전무송은 잠깐 애관극장 간판부에서 간판 칠을 하다 그만두었던 경험을 전하기도 했다. 그중 열살 남짓 되어 보이는 소년이 “애관극장에 추억이 많다”고 해서 웃음이 터졌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극장이 있는 한, 추억은 현재진행형이다.
인천/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