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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앙코르와트에 비밀을 묻다

등록 2020-11-06 06:59수정 2020-11-06 09:55

누구나 비밀은 있어
앙코르와트 갔을 때 일
아름다운 유적지 덕에 황홀경
우연히 들른 한 의사의 첼로 공연
수많은 아이 구한 그
사원에 내 비밀 두고 와
앙코르와트 1층에서 내려다 본 정원과 연못 풍경. 사진 노동효 제공
앙코르와트 1층에서 내려다 본 정원과 연못 풍경. 사진 노동효 제공

‘비밀이 많은 사람은 불행하다, 또한 비밀이 없는 사람도 불행하다.’

오래전 읽은 문장인데 어느 책에선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비밀, 당신에게도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부치지 못한 편지나 연인과 사랑의 맹세를 남겨둔 카페의 벽돌 틈 같은 것. 영화 <화양연화>에서 차우(양조위·량차오웨이)는 앙코르유적에 비밀을 묻는다. 그 순간 앙코르유적은 차우에게 사라진 왕국의 유산이 아니라, 비밀을 간직한 서랍이 된다.

나는 당신이 몇개의 서랍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비밀이 적당한 상대와 때를 찾으며 서랍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리란 건 안다. 비밀은 하나에서 둘로 늘기도 한다, 비밀을 들은 상대가 서랍을 잘 닫아 둔다면. 그러나 알지 못한다. 복제된 비밀이 몇번째까지 비밀일 수 있는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4개, <지옥의 문>은 7개, <칼레의 시민>은 12개의 진품이 있다. 조각품이나 판화의 경우 통상 10~12개까지 진품으로 인정한다. 비밀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

천년 전 크메르인들이 힌두교적 이상을 실현한 사원 앙코르와트​. 사진 노동효 제공
천년 전 크메르인들이 힌두교적 이상을 실현한 사원 앙코르와트​. 사진 노동효 제공

지구를 여행하는 동안 내게도 비밀이 생기곤 했다. 관광객이 몰려들까 봐 숨겨둔 마을도 있고, 어떤 장소를 알아내고서도 입을 다물기도 했다. 달그락. 얼마 전부터 서랍 속 비밀이 달그락거린다. ‘그만 숨통을 열어줘, 어차피 당장 가기도 어렵잖아.’ 그래, 지금 앙코르유적을 찾아갈 여행자는 드물 테고, 코로나19가 가라앉을 때쯤이면 이 글을 기억할 사람도 몇명 없을 테니. 서랍을 연다. 후, 비밀이 숨을 쉰다.

앙코르유적에 새겨 있는 압살라(힌두 신화 속 요정)의 미소. 사진 노동효 제공
앙코르유적에 새겨 있는 압살라(힌두 신화 속 요정)의 미소. 사진 노동효 제공

2000년 <화양연화>, 2001년 <툼 레이더>가 개봉하면서 캄보디아는 한·중·일 관광객이 즐겨 찾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앙코르와트는 여행사 프로그램에서 빠지지 않는 관광지가 되었고, 신혼여행으로 푸껫, 발리, 세부 같은 해변 휴양지 대신 앙코르와트를 다녀오는 친구도 늘어났다. 그들에게 묻곤 했다.

“차우가 비밀을 묻은 장소엔 가봤니?”

“<툼 레이더> 촬영 장소는 찾았지만, 거긴 어딘지 모르겠던데.”

“앙코르유적지를 종종 앙코르와트로 통칭해, 워낙 넓고 사원이 많아. 찾다가 포기했어.”

비슈누 신을 모시는 앙코르와트 내부 풍경. 사진 노동효 제공
비슈누 신을 모시는 앙코르와트 내부 풍경. 사진 노동효 제공

직접 찾아가는 방법 말고 다른 도리가 없었다. <화양연화>를 본 지 오랜 후였고, 코로나19가 퍼지기 전이었다. 비수기로 접어든 시엠립(시엠레아프)의 숙소들은 반값 할인을 했다. 덕분에 수영장까지 딸린 호텔을 잡았다. 침대에 누워 기상시간을 맞췄다. 오전 5시30분. 아침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 타고 앙코르와트로 가야지!

따르릉. 알람이 울렸다. 식사를 하고 숙소를 나섰다. 도심을 벗어나 자전거로 30분, 숲길을 달리는 기분이 상쾌했다. 앙코르유적 7일 입장권을 끊었고, 첫날엔 종일 한 사원에만 머물렀다. 앙코르와트, 정말 아름다웠다.

물론 앙코르와트는 미적 쾌감뿐만 아니라 지적 호기심도 충족시키는 유적지다. 앙코르왕국은 9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번영했는데, 통일신라부터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다. 12세기 초에 지어진 앙코르와트는 당대 크메르인이 다다른 건축술뿐만 아니라 천문학 수준을 보여주며, 힌두교에서 유래한 방대한 상징과 기호가 집대성된 건물이다. 가령 해자(성 주위를 둘러 판 못)는 우주의 대양, 사원은 우주, 중앙 탑은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메루산으로 세계를 유지·보호하는 비슈누 신이 머무는 곳이다. 조선이 사대문을 유교의 4대 덕목에 따라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지문(숙정문)이라 부르고 의미를 부여했듯이 앙코르와트는 당대 크메르인이 힌두교의 이상을 실현한 건축물이었다.

앙코르와트 1층 회랑 가운데 서 있는 비슈누 신상. 사진 노동효 제공
앙코르와트 1층 회랑 가운데 서 있는 비슈누 신상. 사진 노동효 제공

점심나절엔 관광객이 잘 드나들지 않는 도서관(천문 관련 유물이 나온 까닭에 프랑스인이 붙인 이름일 뿐이다) 유적에서 쉬었다. 바닥 돌은 차갑고 열린 창으로 바람이 드나들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회랑의 부조를 둘러보았다. 힌두교를 대표하는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중 쿠루평원 전투, <라마야나> 중 랑카 전투를 묘사한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천년 전 석공들이 새긴 조각은 섬세하고 웅장했으며 생생했다. 거듭 감탄하다가 문득 전쟁을 묘사하기란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 묘사하기 어려운 건 평화가 아닐까?

아침마다 자전거 페달을 밟아 앙코르유적을 찾아다녔다. 단체 관광객이 모이기 전까지 보물찾기에 나선 아이처럼 구석구석을 뒤졌고, 벵골보리수와 무화과나무가 자라는 마당에 앉아 한 톨의 씨앗이 자라 사원 전체를 무너뜨리는 장면을 눈감고 그려보기도 했다. 상상만으로도 기묘한데 눈 뜨면 그 장면이 앞에 펼쳐져 있으니 더 기묘했다. 공룡 발톱 같은 뿌리가 사원을 움켜쥐듯 감싸고 있는데, 사원을 무너뜨리는 중인지 지탱하는 중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앙코르톰으로 들어가는 성문, 한양도성의 4대문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사진 노동효 제공
앙코르톰으로 들어가는 성문, 한양도성의 4대문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사진 노동효 제공

앙코르유적에서 규모가 가장 큰 건 앙코르톰이다. 앙코르는 ‘도시’, 톰은 ‘위대하다’는 뜻. 앙코르톰의 둘레는 13㎞로, 들어가려면 동서남북 사방을 바라보는 사면상(관세음보살 혹은 왕의 얼굴이라고 한다) 아래를 지나야 한다. 도시 중심엔 사면상이 사원을 가득 채운 바이욘이 있다. 멀리선 틈새 없이 빼곡한 건물처럼 보였는데, 층계를 밟아 오르자 네모난 돌창이 나 있고 바람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단체 관광객이 점심식사를 위해 시엠립으로 돌아간 시간, 나는 얼려서 가져온 냉커피와 쿠키로 배를 채우고 빈방에 누웠다. 이대로 돌조각상이 되어버릴 것 같은 정적. 밖을 보면 사면상 위로 흰 구름이 지나갔다. 시간은 흘러가고, 풍경은 한가롭고, 유적은 경이로웠다.

앙코르왕국의 초기 사원으로 시바신을 위한 신전이자 왕의 무덤인 프레룹. 사진 노동효 제공
앙코르왕국의 초기 사원으로 시바신을 위한 신전이자 왕의 무덤인 프레룹. 사진 노동효 제공

숙소에서 앙코르유적으로 오가던 날들, 도로변의 현대식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비토첼로 콘서트, 매주 토요일 7시15분. 무료입장.’ 궁금한 마음에 찾아갔다. 병원이었고, 비토첼로는 첼리스트이자 소아과 의사였다. 콘서트가 시작되자 바흐의 곡들을 연주했고, 중간중간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가난한 나라 아이들이 최소한의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가는데도 그 아이들을 방치하는 건 ‘소극적 아동학살’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는 대부분 가족 중 병든 이가 있기 때문이죠. 당신이 젊다면 피를, 돈이 있다면 돈을, 둘 다 있다면 아이들을 위해 피와 돈 둘 다 기부해주시길 바랍니다.”

기부금을 마련을 위해 매주 첼로 콘서트를 열던 비트 리히너. 사진 노동효 제공
기부금을 마련을 위해 매주 첼로 콘서트를 열던 비트 리히너. 사진 노동효 제공

말을 하면서 숨을 헐떡이던 노인이 첼로를 무대에 내려놓고 계단을 내려갔다. 본명은 비트 리히너. 스위스 출신 의사는 적십자에서 일하던 중 1974년 프놈펜의 칸타보파병원으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캄보디아를 점령한 크메르루주가 외국인을 추방했다. 스위스에서 그는 캄보디아 아이들의 눈망울을 잊을 수 없었다. 1991년 캄보디아로 들어온 그는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고 이듬해 칸타보파재단을 설립해 무너진 병원을 다시 세웠다. 스위스인과 관광객이 낸 기부금으로 칸타보파병원에 이어 4개의 병원을 더 지었다. 재단이 운영하는 5개 병원에서 치료받는 아동은 중증 아동을 포함 연간 50만명, 치료비는 전액 무료다. 그는 자신과 수석의사 외 전 직원을 캄보디아인으로 고용했는데 의사, 간호사, 직원 등 그 수는 2500명에 이른다.

(캄보디아 어린이의 생명을 구하는 데 반평생을 바친 그는 2018년 영면에 들었다. 유년시절 칸타보파병원에서 치료받았던 젊은이가 추모곡을 만들어 불렀다. ‘메이 유 레스트 인 피스, 닥터 비트 리히너’(May you rest in peace, Dr. Beat Richner). 서울의 음악학교에서 작·편곡을 공부한 비소티다 웅의 자작곡이었다. 그 여성은 비트 리히너를 영웅이라 불렀다. 그가 캄보디아인의 영웅이 된 건 드높은 의술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약자에 대한 드높은 사랑 때문이다.)

사원을 거닐던 중 만난 소녀. 캄보디아 아동 중 80%는 칸타보파 병원에서 치료 받은 경험이 있다. 사진 노동효 제공
사원을 거닐던 중 만난 소녀. 캄보디아 아동 중 80%는 칸타보파 병원에서 치료 받은 경험이 있다. 사진 노동효 제공

앙코르유적과 톤레사프 호수를 방문하는 사이 일주일이 금세 지났다. 떠나기 전날, 세번째로 앙코르와트에 들렀다. 첫날엔 압사라(힌두신화의 요정)와 초록빛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둘째 날엔 해자와 사원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날엔 천장, 벽, 모서리의 부조까지 너무나 선명해 보였고, 부서지지 않은 천년 전의 앙코르와트가 환각처럼 떠올랐다. 나는 황홀경에 빠져 중앙 탑부터 층층을 내려오며 사원을 쓰다듬었다.

손끝이 스쳤을 뿐인데 창 문살 하나가 흔들렸다. 창틀에 붙은 듯했지만 석순 같은 문살을 창틀에 올려놓은 것에 불과했다. 나는 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편지를 놓고 문살을 얹자 감쪽같았다. 그리고 밖을 보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화양연화>에서 차우가 비밀을 묻은 건물이 눈앞에 있었다. 왜 여태 못 알아차렸을까? 차우가 비밀을 묻은 곳은 2층 회랑 안마당의 도서관이고, 3층 서남쪽 탑이 동자승이 차우를 바라보던 곳이었다.

화양연화에서 차우가 비밀을 묻은 앙코르와트 유적. 사진 노동효 제공
화양연화에서 차우가 비밀을 묻은 앙코르와트 유적. 사진 노동효 제공

그 편지는 아직 그대로 있을까? 종이도 글도 마른 꽃잎처럼 바스러져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여 당신에게 다시 부친다.

‘피스 포 올 맨카인드, 굿 럭 투 유’(Peace for all mankind, Good luck to you·인류에게 평화를, 당신에게 행운을).

글·사진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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