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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제철 음식이 지구를 지킨다

등록 2020-09-18 09:03수정 2020-09-18 10:51

생산하는 제철 아닌 때 식재료 사는 건 부끄러운 일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젠 그런 걸 지키는 이 거의 없어

아, 1월에 슈퍼마켓에 가서 딸기를 산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8월에 굴을 장바구니에 담아 계산대 앞에 서서 얼굴을 붉히지 않을 자신이 없구나. 그뿐이랴, 아보카도는…. 잠깐, 그나저나 아보카도는 제철이 언제지? 모르겠다. (아마도 아보카도 생산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멕시코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보카도 제철 논쟁을 치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우리는 모두 로컬 푸드를 먹어야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제철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맛이 제일 좋을뿐더러 지역 농가에도 도움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지구에 탄소 발자취를 적게 남기는 일일 테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제철 음식 생산자 편에 서서 지구를 위해 로비해줄 유능한 로비스트가 단 한명도 없다.

1년 중에 특정 시기에만 먹던 음식들이 오늘날에 와서는 이런들 어떠하랴, 저런들 어떠하랴 식이다. 몇 월에 먹는 음식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아무 때나 소비하고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제철 음식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 세계 어느 지역에 있는 레스토랑이든 상관없다. 레스토랑의 메뉴를 한번 들여다보자. 1월 메뉴엔 그리스식 샐러드가 등장하고, 7월에 퐁뒤가 떡하니 적혀 있다. 손님이 원하는 음식은 언제든 대령하려는 레스토랑들은 그야말로 계절을 거스를 자유를 얻은 듯 보인다. 이건 잘못된 것이다. 당신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 이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 문화가 팽배한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제철 밥상 달력 따위 보기 싫으면 엎어버리면 그만이다.

겨울로 접어드는 요즘 뭘 먹느냐만 생각하는 나
제철 음식이 아니라 어머니가 예전 해준 완자 요리
지구 대통령 된다면, 때에 맞는 음식 지정할 터
크리스마스 푸딩, 여름에 먹자는 이들 깨버릴 거야

나조차도 계절 예법을 무시한 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백해야겠다. 최근에 저지른 범죄는 지난해 한여름 런던의 ‘홀본 다이닝 룸’(Holborn Dining Room)이라는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한 일이다. 겨울철에 많이 먹는 ‘스테이크 앤 키드니 푸딩’(Steak and kidney Pudding)을 시켜 먹은 것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후루룩 흡입해버렸다.) 스테이크와 소의 신장 부위를 조리한 후 파이지(파이 시트)에 감싸 한 번 더 찐 진한 푸딩이 함께 나온 메인코스 요리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창작물이다. 진한 소스를 깐 새하얀 접시에 정갈하고 고고하게 솟은 그 모습은 무슨 신석기시대의 유적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무런 장식도 없었지만 말이다. 무너지지 않게 벽을 지탱하기 위해 끈적끈적해질 때까지 졸여서 만든 성루였던 것이다.

난 소화도 잘 안 되는 그 고깃덩어리 요리를 나 혼자서 다 먹었다. 소의 콩팥에서 나는 희미한 지린내가 마지막 맛으로 올라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말이다. 깨끗이 접시를 비우고 레스토랑 문을 열고 나와 발을 딛는 순간, 내 얼굴에 닿는 뜨거운 여름 햇빛을 맞으며 난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난 나태했다. 내 나태함에 무척이나 수치스러웠다.

계절이 바뀌어 겨울로 접어들고 있는 현재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가장 중요한 생각은 ‘지금 무엇을 먹어야 할 것이냐’에 관한 것이다. 종종 ‘스테이크 앤 키드니 파이’를 먹었던 기억을 꺼내 든 내 뇌는 덤플링이 먹고 싶다고 하고 있다. 덤플링 중에서 어떤 것? 만두냐, 샤오룽바오냐, 딤섬이냐, 완자냐? 내가 먹고 싶은 것은 그냥 깔끔하게 빚은 만두가 아니었다. 딘타이펑의 샤오룽바오 같은 것도 아니고, 예쁜 딤섬도 필요 없다. 난 쇠기름으로 만든 투박한 완자 같은 고기 경단이 먹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매년 겨울이 되면 소의 신장에 달린 쇠기름에 베이킹파우더를 섞은 밀가루를 묻혀 완자를 빚곤 했다.(그러고 보니 또 소의 콩팥 요리 이야기네. 내가 소의 콩팥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군.)

어머니가 만들어준 완자는 스튜의 저 깊은 심해에 매복해 있다가 불쑥 나를 놀라게 했다. 그 맛이 조밀하기로는 폭발하는 성운처럼 빽빽하고, 묵직하기는 역기만큼 무거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적 같았던 점은 뭉근하게 오래 끓여 밀가루로 걸쭉해진 스튜 속에서도 완자의 형태가 결코 풀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스튜에 집에서 직접 만든 국물 맛내기 양념과 각종 채소와 그때그때 손에 잡히는 술을 넣어 끓였다. 이 밀가루 냄새 풀풀 풍기는 둥그런 물체는 내 몸속 깊숙한 곳에 들어가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욕심 많고 머리 나쁜 래브라도들이 멋모르고 삼킨 바닷가 자갈들처럼 말이다. 내 어머니의 스튜는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중국 음식과 일본 음식을 대할 때 정확하게 지켜야 할 게 있다면서 시시콜콜하고 무궁무진하게 많은 규칙과 상황에 관해 침 튀겨가며 이야기한다. 그러느라 북유럽의 겨울 음식은 말로 풀어낼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잊고 살진 않는가. 쇠기름으로 만든 완자는 씹는 맛이 환상적이라는 것도 잊는다. 동굴 생활하던 자들에게 갑자기 떡을 주는 것만큼이나 불경한 도발이 될 것이라는 점도 말이다. 쇠기름으로 만든 완자가 위대하기 때문에? 바보가 아닌 이상 쇠기름 완자를 한여름에 먹겠다고 덤비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지구의 첫 번째 대통령이 된다면, 난 때에 맞게 먹는 음식을 정할 것이다. 총통이 되겠다거나 파시즘을 휘두르겠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난 ‘팬케이크 데이’에만 팬케이크를 먹어야 한다고 하진 않을 것이다.(내가 전에 뉴올리언스에 대해 쓴 한겨레 칼럼 기억하는가? 사순절 하루 전날, 참회의 화요일에 영국에서는 팬케이크 먹는다고.) 난 그런 괴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팬케이크 플랩잭은 11월에만 먹어야 할 거야. 귀리에, 흑설탕에, 당밀까지 넣고 구운 두껍고 텁텁한 쿠키인지 팬케이크인지 모를 그런 음식은 10월 넘어서 11월에만 먹게 할 거야.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이런 말을 해서 정말 유감이지만 삼계탕은 아무리 봐도 여름에 먹을 음식은 아니야.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넣고 끓이는 수프를 왜 한여름에 먹느냐고! 그래놓고 어떻게 시원하다고 말할 수 있냐고! 먹고 나면 땀범벅이 되는데 어떻게 몸이 재충전된다고 할 수 있냐고!

믿거나 말거나 난 크리스마스 푸딩을 여름에만 먹는 이들을 알고 있다. 크리스마스 푸딩이란 자고로 여름까지 몇 달간 푹 묵혀둬야 제맛이 난다고 주장하는 작자들이다. 뭐 맞는 말이긴 하다. 푸딩 맛이 더 나빠질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먹는 것일 테니 말이다. 나는 이 상황을 앞으로 영원히, 완전히 불식시키겠다. 1년 중 크리스마스 푸딩을 먹기 가장 좋은 시기, 먹어야 하는 때 같은 것은 따로 없다고 이 자리에서 못을 박겠다. 단, 크리스마스 당일만 아니면 되는 거다.

글 마이클 부스(푸드 칼럼니스트), 일러스트 이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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