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의 갑은 물론 안주 없이 마시는 사람이다(라고 한다). 술 자체의 풍미를 해치는 어떤 안주도 곁들이지 않기 때문이라나. 소금 찍어 먹는 정도는 허용되는 모양이다. 을은 최대한 안주를 덜 먹는 사람이다. 역시 갑과 같은 맥락이다. 나는 그런 수준이 못 된다. 자, 서부영화를 볼 때 제일 거북한 장면이 무엇일 것 같은가. 악당들이 진을 치고 있는 바에 들러서 주인공이 “위스키 더블”을 외치고는 맨입에 홀짝이는 거다. 하다못해 땅콩이라도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래서 비행기에서 술을 시키면 땅콩을 갖다 바친다. 안 그러면 사무장 목이 날아간다.)
나도 주당 흉내를 내보려고 맨입에 소주며, 위스키를 마셔보았다. 안 되더라. 뭐라도 먹어야 한다. 그래서 대다수 평범한 주당은 하다못해 멸치에 고추장, 단무지, 새우깡, 심지어 초콜릿 엠앤엠즈, 오징어 다리라도 씹는다. 마른멸치 안주는 나중에 따로 다뤄보고 싶은데, 무궁무진한 술안주의 산실이다. 좋은 멸치를 마요네즈와 청양고추 듬뿍 넣은 간장에 찍어 먹는 맛은 아주 훌륭하다. 우습게 볼 게 아니다. 마요네즈가 가진 지방과 산, 매운맛의 향신료, 간장의 단맛과 감칠맛이 조화된 뛰어난 배합이다. 이런 안주라면 막걸리 서너 병은 너끈하다. 멸치볶음은 또 어떤가. 구운 마른멸치를 드셔 봤는지. 오사리멸치처럼 기름이 올라서 노르끼리한 국거리용 멸치를 가스 불에 석쇠 올리고 구워봐라. 이거 별미다. 찌직, 기름이 타면서 풍미를 낸다. 마른안주 얘기는 여기서 그만. 오늘의 주인공은 파다.
요즘은 쪽파가 드문 철이지만 쪽파나 대파, 실파 다 좋다. 우리 장에 조합이 맞는다. 보통 마늘이나 풋고추, 청양고추만 간편 안주로 술상에 오르는데, 왜 파를 그렇게 내지 않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말로 끝내준다. 파는 고추장, 된장, 막장(마늘을 섞어서), 쌈장, 간장(식초를 섞어서) 다 어울린다. 일본식으로 쪽파에 ‘간장 + 가쓰오부시’ 조합도 좋다. 샐러드에 뿌려 먹는 1회분 견과류를 쌈장에 조금 섞고 참기름을 뿌려봐라. 거기에 대파를 푹 찍어 먹으면 꿀맛이다. 술을 더 사러 슬리퍼 끌고 편의점에 나가야 한다. 장은 그 자체로 준비된 안주다. 단, 장맛을 올려주는 채소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포장마차에 가면 오이에, 당근에, 풋고추에 멸치를 내는 거다. 이제부터 파를 추가해주시라. 양파는 주는데 왜 파는 안 주는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다. 장에 가면 양파와 파가 구분이 안 된다. 줄기와 구근이 다 달려 있다. 구근이 크면 양파, 작으면 그냥 파다. 그러니까, 두 양반은 이종사촌 정도가 아니라 친형제라는 소리다. 한데 나는 사각사각 씹히는 양파보다 그냥 파가 좋다. 물론 안주로 쓸 때 그렇다는 뜻이다. 양파는 원래 아주 고급 재료였다. 1883년 개항 이후 중국인들이 들어오면서 크게 번성했다. 중국인들은 채소 재배에 일가견이 있다. 우리가 김장에 쓰는 중국 배추도 그런 과정을 거쳐 한국인 김장독에 안착했다. 하여튼 그 귀하던 양파는 한국 땅에서 대량 재배되면서 아주 만만한 재료가 됐다. 한국의 중국집에서 가장 사랑하는 재료가 된 건 물론이고.
파를 지구에서 가장 좋아하는 민족은 중국인인 듯하다. 특히 산둥사람이다. 그들이 누구냐, 바로 우리 화교의 핏줄이다. 그 많은 옛날 화상(華商) 중국집은 그러므로 산둥사람의 혈통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네들이 좋아하는 게 파다. 일제강점기 무렵 한국에서 일하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장에 생파를 찍어서 밥을 먹거나, 밀가루 전병에 끼워 넣어 샌드위치처럼 식사를 했다. 옛날 한국의 중국집에서는 생파에 춘장이나 두반장을 줬다.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대체로 나이 쉰 줄 이상이다.
양파와 대파는 철이 다르다. 겨울엔 대파, 여름엔 양파를 줬다. 그것도 없는 철에는 양배추도 내고, 무도 냈다고 한다.(이건 내 기억에 없어서 노장 중화요리사에게 들었다.) 지금처럼 1년 내내 양파가 싸고 흔하며 보관성이 좋아서 몰빵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이제는 중국집에서 직접 담그는 두반장도 없고, 대파 내는 문화도 없어졌다. 물 타서 묽게 만든 춘장에 양파를 준다. 그것도 술안주로 나쁘지 않지만, 기왕이면 두반장에 대파, 그것도 연백부(흰 부분)를 주면 얼마나 좋을까. 옛날 아주 옛날, 당시엔 무명이었던 이 아무개 주방장이 압구정동에서 중국집을 할 때 일이다. 어찌 안면을 트고 친해져서 갈 때마다 두반장에 대파를 주십사 하곤 했다. 아리고 달콤한 대파의 연백부에 두반장을 찍으면 소주나 이과두주 정도는 너끈히 넘어갔다. 시중의 두반장은 대개 쓰촨식 매운맛이다. 안 매운 것도 더러 있는 모양인데 구하기 쉽지 않다. 나는 매운 두반장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서 찾아보지도 않았다.
집에 칭다오나 국산 맥주 몇 병 사 들고 와서 대파를 썬다. 줄기와 줄기 밑의 억세고 단단한 부위는 과감하게 잘라내고 연백부만 취하는 것이 내 취향이다. 다른 부위는 다른 요리에 쓰면 된다. 비록 공장 제품이지만 두반장을 뜨고, 식초를 조금 친다. 한국 된장을 조금 섞어도 좋다. 옛날 중국인 노동자 아저씨들처럼, 대파 줄기를 맨손에 들고 우적우적 씹어도 좋겠다. 카. 맥주 맛 산다.
(독자 전상서: 정말 이 안주는 가장 손쉽고도 이국 취향을 만족하게 해주는 최상의 것 중 하나입니다. 안주 만들기 싫어서 대충 고른 아이템이 아닙니다. 아, 진짜라니까요.)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