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그리니치빌리지의 스툽. 사진 최이규 제공
코로나19 이후,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계단을 자주 사용하게 됐다. 평소 계단이란 화재나 지진 상황에서 비상용으로 마련한, 혹은 이삿날 점유되어 버린 엘리베이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르내려야 하는 통로였다. 최근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튼을 누르기도 싫어서 그냥 계단으로 냅다 달리는 경우가 많다. 가끔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엘리베이터에 가득한 술 냄새, 땀 냄새의 기억도 그 불안감에 한몫할 것이다. 통풍이 된다고는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최소한의 거리두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무척이나 좁고 폐쇄된 공간이다. 그래서 약간 낯을 가리는 승객이라면, 공간이 넉넉해도 다음 차례를 기다리곤 한다.
그나마 운동이 되지 않을까 위안 삼으며 계단을 올라보지만, 여기 또한 그다지 쾌적한 경험은 아니다. 승강기가 갖춰진 건물에서 계단이란 마지못해 만들어놓은 곳일 뿐, 디자인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기에 바닥만 살피며 종종걸음을 칠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개 아파트의 계단실이란 엘리베이터 못지않게 폐쇄된 그야말로 ‘실’(室)이다. 누가 담배라도 피웠는지 공기는 항상 텁텁하다. 발을 디디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기분 나쁜 정적도 심리적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A에서 B지점으로 수직 이동을 도와주는 통로로 계단을 보는 시각이 머물러 있는 한, 개선의 가능성은 작다. 오르자면 피곤한 노동일뿐이고, 내려가자니 무릎 관절만 아픈 곳이다. 하지만 상황이 늘 그렇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없던 예전의 아파트들에서 계단은 여전히 힘든 곳이지만, 아이들이 놀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장소였다. 많은 경우, 계단은 ‘실’이 아니었고, 외부 공기에 열려있었기 때문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주거가 고층화되면서 우리는 그러한 정겨운 계단을 만드는 습관조차 잃어버린 듯싶다. 어떤 건물의 경우엔, 계단을 찾기조차 쉽지 않다. 잘 보이지 않는 후면부에 꼭꼭 숨겨놓는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건축가 김종석씨는 발상의 전환에 성공한 케이스다. 단순히 계단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건물의 전면에 내세운다. 그에 따르면, 건물 내부 계단을 오르는 과정은 그저 힘 드는 일일 뿐이지만, 외부 계단은 하나의 경험이다. 오를 때 느끼는 에너지 소비도 훨씬 적다. 시선을 받는다는 것, 층을 오를 때마다 거리의 풍경이 바뀌는 것을 보는 일은 계단이 단순 노동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시작함을 알려준다. 외부 계단을 걷는 이용자는 주목받는 배우로서 일상의 드라마를 만드는 일원이 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계단. 사진 최이규 제공
전통적 공간심리학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양면적 욕구가 있다고 한다. 조망의 욕구와 은신의 욕구다. 인간이 사바나의 여느 동물이었을 적을 설명하는 이 가설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피식자로 보는데, 나를 공격하는 대상을 수비하기 위해 주변을 멀리 살펴야 하고, 내 몸을 숨겨야 함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인간을 수동적 존재로 보는 시각이 깔려있다. 이에 반해 최근의 관점은 도시를 하나의 무대로, 인간을 배우와 관객으로 인식한다. 나는 배우가 될 수도, 관객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어딘가에 몸을 숨기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나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한다.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은 계단이 이러한 목적에 부합한 매우 훌륭한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전면부 계단이 선명한 예다. 사람들은 특별한 목적도 없이, 계단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인상파의 유화보다, 이집트의 미라보다 더 재밌는 볼거리는 바로 평범한 뉴욕 거리의 풍경이다. 지나가는 이층버스의 사람들, 핫도그를 굽는 자욱한 연기, 서로를 부르는 소리, 연주들, 치장한 관광객들의 컬러와 향수 냄새는 영화의 한 장면보다 훨씬 더 생생하다. 사람들은 계단에 앉아 햇볕을 쬐며, 사람을 구경하고, 또 구경의 대상이 되며,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물론 사진은 필수다. 나 자신의 존재를 인증하기에 이곳만 한 무대는 없다.
숨김은 불안을 만들 뿐, 없애지 못한다. 아무리 여러 겹의 도어 록을 설치한다 해도, 완전히 안전하며 완벽하게 숨기는 불가능하다. 도시이론가 제인 제이콥스는 거리의 눈을 강조했다. 담을 치고, 자물쇠를 잠그는 대신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이 무엇보다 효과적인 자연적 감시 체계를 형성한다는 주장이다. 그가 살았던 그리니치빌리지에 가보면 그 생각에 공감할 수 있는데, 집마다 입구에 늘어선 스툽이라고 불리는 계단을 통해서다. 네덜란드 이민자들의 건축 유산인 스툽 공간은 비록 작지만, 가장 활발하게 이용되는 소셜 스페이스다. 소박한 와인 파티가 열리기도 하고, 기타 합주가 펼쳐지는가 하면, 헌 옷가지들을 내어놓는 벼룩시장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하고, 엄마들이 잠깐 쉬며 하루의 긴장을 녹이는 곳이기도 하다. 그 매력의 비밀은 약간의 높이차에 있다. 계단에 의해 만들어지는 불과 1~2m의 높이차는 거리라는 공적 공간과 집이라는 사적 영역의 경계를 만들어주는 장치다. 이 때문에 실제 몸은 거리에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집 안과 비슷한 안심과 여유를 준다.
스툽이 도시와 가정 사이의 전이공간이라면, 도산서원의 계단은 일상과 학문 사이의 전이공간이다. 전교당 계단은 그 꼿꼿한 수직성과 가차 없음을 통해 엄중한 선비 정신의 에센스를 보여준다. 워낙 가파르기 때문에 꼿꼿이 걷기는 불편하고 발을 약간 비틀어 조심히 오르내려야 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자빠져 다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겸양과 수신의 메시지가 또렷하다. 서원은 조선시대의 기숙형 고시원이므로 교실과 기숙사 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 그 짧은 동선에서 생활하는 마음을 학문하는 마음가짐으로 전환하기에 이 계단만큼 효과적인 전이공간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성리학적 계단이 우리 건축 정신의 요체라고 본다.
홍콩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사진 최이규 제공
세계적으로 가장 명실상부한 계단 왕국은 홍콩 섬이다. 어느 집이건 간에 계단 한두 곳을 거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을 정도다. 바닷가 쪽 평지에는 초고층 건물군의 직장이, 산의 비탈면에는 집들이 위치하기 때문에 홍콩 사람들은 매일 많은 계단을 오르내릴 운명이다. 그런데 홍콩은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라는 획기적 발상을 내놓고 실천에 옮겼다. 아침에는 직장 쪽으로, 오후에는 집 쪽으로 에스컬레이터가 작동한다. 이걸 타고 도로와 골목을 지나 산 위로 올라가는 과정은 단지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에 나오는 풍경들을 마주하는 감성적 경험일 뿐만 아니라, 민주적 문명사회를 추구하는 홍콩의 노력과 실용주의를 확인할 수 있는 감동적인 여정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떤 멋들어진 계단보다 이 전동식 계단을 가장 사랑한다. 줄줄이 올라가는 사람들 틈에 서 있으면, 자연스럽게 공동체로서의 연대감을 느낄 수 있다. 전혀 첨단이 아닌 평범한 기술을 통해 계단이라는 문명의 가장 오래된 공간적 유산을 진화시킨 놀라운 업적이다.
최이규(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