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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아…볼리비아의 천국

등록 2020-05-08 16:49수정 2020-05-08 16:55

여행자들이 찬미하는 마을, 사마이파타
하루 계획했다가 한 달 살게 되는 곳
여행서에도 언급된 적 없는 낙원
라면 끓여주자 극찬한 이들과 만남 등
떠나는 날 축복 아끼지 않는 그들은 형제
안데스 기슭의 마을, 사마이파타를 내려다 보는 필자. 사진 노동효 제공
안데스 기슭의 마을, 사마이파타를 내려다 보는 필자. 사진 노동효 제공

“사마이파타, 작은 마을이지만 넓은 품을 갖고 있어요. 하루만 머물려고 했는데 한 달이 되어버렸죠. 사마이파타, 고운 마음씨를 가진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아요. 걷기 좋은 골목을 지나면 파파야, 토마토, 망고를 파는 시장이 나오죠. 사마이파타, 날씨는 화창하고 산책길은 즐거워요. 하루만 머물려 했는데 한 달이 되어버렸죠.”

서울 시민이 ‘서울의 찬가’를, 부산시민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목포시민이 ‘비 내리는 호남선’을 부르는 건 봤지만, 여행자가 체류하는 마을의 찬가를 만들고 부르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노래하는 히피 커플의 표정은 또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지!

사마이파타(Samaipata)는 해발1700m, 안데스 기슭에 있는 볼리비아 마을이다. 유명 관광지도 아닌 터라 남미를 다녀온 이들의 여행서에도 언급된 바가 거의 없다. 총인구 4000명, 읍내 인구도 1000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인데 프랑스·영국·독일·스페인·네덜란드·벨기에·미국·오스트레일리아·아르헨티나·콜롬비아 등 수십개 나라에서 온 이주민과 원주민이 산다. 특히 보헤미안 기질의 예술가들이 유난히 많았다. 도착 직후 길에서 만난 윌리엄 파워스도 <뉴 슬로우 라이프: 세상에서 가장 빠른 도시에서 단순하게 살기>의 저자였다.

“뉴욕에서 살다가 사마이파타로 온 이유가 뭐니?”

“연중 날씨가 평온하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다니기에 안전하거든.”

미사가 진행 중인 사마이파타 성당. 사진 노동효 제공
미사가 진행 중인 사마이파타 성당. 사진 노동효 제공

어린 딸과 산책 중인 빌(윌리엄의 애칭)의 대답이었다. 빌과 헤어진 후 마을을 더 둘러보기로 했다. 슈퍼마켓이 있는 국도에서 안길로 들어서면 은행이 나오고, 은행을 지나자 성당이 있는 광장이 펼쳐졌으며, 카페 옆으로 접어드니 시장이었다. 수프와 소고기 스테이크를 세트로 파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2000원이 되지 않았다. 체 게바라 초상화가 붙어 있는 피자집 벽에 월세방 광고가 붙어 있었다. <방 2칸, 거실, 부엌, 냉장고, 세탁기, 월250달러>. 사람들은 낯선 여행자에게 반갑게 인사했고, 두 번을 만나면 친근하게 말을 걸었고, 세 번을 만나면 볼 키스를 했다. 오래 머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남미에선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다. 대부분 나라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기에 스페인어를 익혀야 한다. 은행에 갔다가 맞은편 가게 유리창에서 <스페인어 레슨, 영어 가능> 쪽지를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볼리비아인 나노와 프랑스인 델핀이 운영하는 공예품 가게였다. 프랑스에서 고교 동창으로 만나 부부가 된 두 사람은 3년 전부터 사마이파타에서 지내는 중이라고 했다. 그 전엔 아프리카에서 살았다고 하니 이들은 일생 몇 개 나라에서 살 셈일까? 델핀으로부터 스페인어 수업을 받기로 했다. 보통은 단둘이 수업을 했고, 수업을 빙자한 요리를 할 땐 나노와 두 딸까지 어울려 파티를 벌였다.

“오늘 주제는 요리야. 스페인을 대표하는 음식, 파에야를 만들어볼까? 이건 스페인어로 아로스(쌀), 이건 피미엔토(고추), 이건 비노(포도주), 잔을 부딪칠 땐 이렇게 소리치지, 살룻!”

주말엔 큰 시장이 섰다. 대도시에서 온 나들이객, 채소 파는 주민, 수공예품을 파는 히피, 부모님을 따라온 아이들로 온 마을이 들썩였다. 산에서 내려온 이들은 친구를 만나 회포를 풀었다. 가장 시끌벅적한 술집은 ‘보헤메’였다. 메뉴판엔 술과 함께 안주 목록이 적혀 있지만, 요리사는 따로 없었다. 주문이 들어오면 맞은편 식당 ‘코시나’로 주문하는 식이었으니까. 보헤메는 부엌을 따로 두지 않아도 되고, 코시나는 매상이 느니, 서로 ‘윈윈’이었다.

코시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여행자. 사진 노동효 제공
코시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여행자. 사진 노동효 제공

일요일엔 성당에도 갔다. 신부의 이름은 ‘후안’이었는데 ‘후아니토’로 불러달라고 했다. ‘~ito’는 작다는 뜻이니 유년시절의 별명이었을 것이다. 미사 때를 제외하면 늘 반소매에 반바지, 야구 모자를 쓴 차림이었다. 아이들이 신부를 발견하면 손 흔들며 소리쳤다. “파파, 농구 하러 가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응, 농장일 끝나는 대로 갈게!” 청소년들이 중년의 사제와 친구처럼 어울리는 모습이 처음엔 얼마나 어리둥절하던지! 나는 후안을 초대해 포도주에 곁들일 요리(?)를 대접하곤 했다. “한국 라면은 정말 맛있군! 하나에 얼마야? 다음엔 내 것도 몇 개 사다 줘!”

오래 머무니 동물 친구도 생겼다. 첫날부터 졸래졸래 따라온 개가 다음 날까지 숙소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음식을 조금 나눠준 후론 어디서 만나기라도 하면 반색하며 달려와 동행하기 일쑤였다. 주인 없는 개가 아닐까, 했는데 알고 보니 인근 호스텔의 개였다.

“제 밥은 다른 녀석들이 먹게 내버려 두고 여행자를 따라다니면서 아무 데서나 자. 낯선 여행자가 나타나면 한눈에 알아본다니까! 친한 척하면 먹을 것을 주니까. 이제 심바는 내 개가 아니라 온 마을의 개야.”

견주인 얀의 푸념이었다. 심바 말고도 마을엔 풀어놓은 개가 몇 마리 더 있었는데 성당에 들어와 미사를 보기도 했다. 개가 들어왔다고 쫓아내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그들도 마을 주민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런 개들은 짖거나 으르렁거리지도 않았다. 집 안팎을 오가며 낯선 동물, 사람, 사물을 숱하게 접한 개들의 특징이었다. 그에 비해 갇힌 마당에서 늘 같은 경험만 하는 개들은 외부 세계를 대하는 자세부터 달랐다. 불빛에 날아든 나방 그림자를 향해서도 짖고 송곳니를 드러냈다. 문득 인간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건 왜일까?

나를 치료해 준 치과의사. 오지를 찾아다니는 이동식 치과를 운영한다. 사진 노동효 제공
나를 치료해 준 치과의사. 오지를 찾아다니는 이동식 치과를 운영한다. 사진 노동효 제공

평온한 날들이라도 고통이 없을 리는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잇몸이 욱신거리더니 볼이 퉁퉁 부어올랐다. 공립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입안을 들여다보더니 신경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말했다. 여권 번호를 적고 매주 예약 시간에 맞춰 병원으로 갔다. 완치 후 치료비를 냈는데 10000원에 불과했다.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는 볼리비아에서 거의 무상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심지어 난 30일 비자를 받고 들어온 여행자였는데 말이다.

남미를 여행하는 동안 전염성 바이러스가 돌거나 기운이 빠지면 사마이파타로 돌아와 쉬었다. 사마이파타의 어원은 케추아어(남미 인디언 언어)로 ‘언덕에서 쉬다’는 뜻이다. 들락날락하며 마을의 변화도 느낄 수 있었는데, 특히 눈에 띈 변화는 도서관이었다.

옛 도서관은 마을 외곽에 있는데다가 관리가 되지 않아 버려진 책들의 무덤 같았더랬다. 시장 입구로 옮긴 새 도서관엔 아이들로 가득했다. 여권 복사본과 연락처를 남기면 여행자도 책을 빌릴 수 있다고 했다. 담벼락에 <어린 왕자> 삽화가 그려진 도서관은 곧 마을의 명물이 되었다. 한 마을이나 도시의 랜드마크가 반드시 높고 큰 건물일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도서관이 있는 골목은 보행자 거리로 자리 잡았고, 히피풍 카페도 들어섰다. 야외 테이블에 앉은 여행자들이 사마이파타 찬가를 불렀다. “하루만 머물려 했는데 한 달이 되어버렸죠.”

사마이파타엔 매일 10여명의 여행자가 들고 난다. 그들 중 10%는 장기 체류자로 바뀐다. 그리고 일부는 눌러앉아 주민이 된다. 기타, 북, 피리 같은 악기를 주렁주렁 매단 히피들이 해시계 아래서 주민들에게 묻는다. “근처에 텐트를 칠 수 있는 숙소가 있나요?” 내게 물어오면 하르딘 호스텔을 알려주곤 했다.

&lt;어린 왕자&gt; 삽화가 그려진 사마이파타 도서관 담벼락. 사진 노동효 제공
<어린 왕자> 삽화가 그려진 사마이파타 도서관 담벼락. 사진 노동효 제공

하르딘 호스텔의 주인장, 얀 또한 한땐 히피였다. 히피들은 다양한 공동체(하루 4~6시간 일손을 돕고 숙식을 제공받는다)를 오가며 여러 기술을 익힌다. 흙집 짓기, 유기농법, 허브 재배법 등. 마음에 드는 마을을 만나면 익힌 기술을 활용해 둥지를 틀기도 한다. 얀은 10년 전 남미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사마이파타에 들렀다. 하루가 한 달이 되고, 따뜻한 사람들이 좋았다. 네덜란드로 돌아가 전 재산을 팔고 다시 사마이파타로 왔다. 땅을 사고, 공동체를 만들고, 여행자들과 함께 흙집을 지었다. 하르딘 호스텔의 시작이었다. 사마이파타엔 10여개의 공동체가 있다.

배낭여행자들이 천국이라 부르는 곳들은 산천이 아름답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냥 좋은 곳이다. 처음엔 히피들이 다녀가고, 이어서 배낭여행자가, 그리곤 관광객이 몰려든다. 이쯤 되면 숙박업소, 식당, 클럽이 우후죽순 들어선다. ‘심심한 천국’이 ‘신나는 지옥’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나는 2년에 걸쳐 사마이파타를 세 차례 방문했다. 사마이파타는 늘 ‘배낭여행자들의 천국’ 초창기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마이파타를 떠나던 날을 기억한다. 일요일이었고 미사에 참석했는데 갑자기 후안이 나를 앞으로 불러냈다. 신부가 말했다. “로는 남미에 온 후 거듭 사마이파타를 방문하면서 우리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로가 다시 먼 길을 떠납니다. 그의 여행길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다 같이 기도합시다.”

덕분이었을까? 그 후 남미 여행길엔 늘 행운이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았더랬다.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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