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향우리술교육원 안진옥 원장이 만든 가양주. 박미향 기자
장면 1
“효모에게 인사해~” 직장인 정아무개(38)씨는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에게 말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두 아이는 신이 났다. 엄마가 커다란 그릇을 가져와 주걱으로 저으라고 하는데, 그 안엔 시큼한 향이 그윽한 국물이 가득하다. 뽀글뽀글 술 익는 소리가 신기하기만 하다. 경상북도에 있는 한 양조장 술을 마신 적 있는 정씨는 그 맛이 잊히지 않았다. 그 이후로 애주가가 된 그가 가양주 제조에 나섰다.
장면 2
지우(7)는 엄마가 뽀얀 국물이 가득한 큰 대접을 가져와 “주물러~”라고 하자 뭔가 싶었다. 작은 손을 집어넣자 보드라운 밥알이 잡혔다. 엄마는 말했다. “이게 술이 되는 거야.” “정말? 이게 술이 된다고? 엄마~” 지우는 그 날 별난 체험을 했다. 자신이 조물조물 주무른 게 술이 됐다. 놀이처럼 즐거웠다. 술은 엄마와 아빠만 마셨지만, 섭섭하진 않았다.
지우 엄마도 직장인이다. 워킹맘인 정씨와 지우 엄마는 일제강점기에 말살된 가양주 문화를 복원하기 위해 술 제조에 나선 것일까? 아니다. 순전히 코로나19 때문이다. 재택근무를 명받고 선택한 도전이다. 엿가락 같은 하루다. 술 빚기는 긴 하루를 메우기에 더없이 좋은 취미다. 하지만 이들처럼 막상 술 빚기를 결심해도 난감하다. 무엇부터 해야 할까?
지난 10일 만난 진향우리술교육원 안진옥(57) 원장은 “남은 밥이나 떡만 있어도 충분하다. 쉽고 간단하다”고 말한다. 서툰 솜씨로 만든 술이라도 직접 빚으면 맛이 더없이 그윽하다. 가심비 최고다. 각종 국내 전통주 선발 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안 원장은 술 빚기 경력 10년차 우리 술 전문가다.
술은 지에밥(고두밥) 만들기가 출발점이다. 땅이 있어야 건축이 가능하듯이 지에밥이 있어야 술이 익는다. 안 원장은 조언한다. “고두밥 짓는 것, 고민할 필요가 없다. 밥알이 톡톡 떨어지는 정도로 꼬들꼬들한 밥이나 햇반만 있으면 된다.” 그가 스테인리스스틸 양푼에 밥을 넣어 으깼다. “이제 엿기름물을 만들 거다.” 엿기름물이라고? 식혜를 만들 때 쓰는 재료가 아니던가! “누룩을 넣으면 좋지만, 가정에선 엿기름물만으로도 충분하다. 간편한 방법이다.”
누룩은 술의 얼굴이다. 술의 개성을 살리는 요소이자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다. 일제강점기 이후 우리는 주로 일본의 개량 누룩을 사용했다. 우리 누룩(곡자)과 일본식 개량 누룩은 차이가 있다. 술 제조엔 누룩곰팡이와 효모가 필요한데, 곡자에는 이 둘이 다 있지만 일본식 개량 누룩엔 누룩곰팡이만 있어서 효모를 따로 넣어야 한다. 몇 년 전부터 가양주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곡자를 사용하는 이들도 늘었다. 전통을 유지하는 가양주 양조장도 직접 누룩을 빚는 곳이 많다. ‘이참판댁 가양주’로 알려진 충남 아산의 연엽주만 해도 밀, 녹두, 옥수수, 엿기름 등으로 만든 누룩이 재료다. 부산 금정구 산성마을 공동체도 금정산성막걸리의 재료로 직접 빚은 누룩을 사용한다. 판매하는 우리 전통 누룩엔 송학곡자, 진주곡자 등이 있다. 둘 다 역사가 오래된 우리 누룩이다. 쿠팡 등 온라인 쇼핑몰에서 판다.
호박 백설기로 만든 우리 술. 이화주처럼 떠먹기 좋다. 박미향 기자
안 원장이 날랜 솜씨로 엿기름물을 만들었다. “엿기름 2컵, 물 5컵을 섞어 만드는데, 온도는 대략 55℃에 맞춘다. 이것조차 번거로우면 엿기름 티백을 써라.” 그는 밥과 엿기름물을 섞은 다음 알맹이가 안 잡힐 정도로 주무른 후에 2시간 식혔다. 그런 다음 효모와 설탕을 마저 넣었다. “효모는 55℃에선 활성화가 잘 안 된다.”
그는 플라스틱 통에 완성한 회색빛 액체를 주룩 넣었다. 2~3일 그늘진 곳에서 보관하면 술이 완성된다. “하루 한 번 저어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발효가 진행되면 위와 아래 온도 차가 나기에 저어주어야 한다.” 엿기름물을 만들 때 섞는 물의 양을 줄이면 요구르트 같은 술이 탄생하기도 한다. 일명 ‘떠먹는 술’이다. 이화주와 유사하다. 고려시대부터 만든 이화주는 고급 우리 술이다. 도넛처럼 가운데가 뚫린 구멍떡과 쌀누룩 등으로 만드는 독특한 전통주다. 선조들은 휴대가 간편해 들고 다니기도 했다. 지천으로 널린 물에 섞으면 바로 벌컥벌컥 마실 수 있는 탁주가 됐다. ‘떠먹는 술’이 ‘마시는 술’로 변신하는 것이다. 이름 그대로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에 빚는다. 수줍게 떨어지는 배꽃은 하늘에서 떨어진 팝콘 같다. 탐스러운 모양새가 보기만 해도 달다. 그 꽃을 벗 삼아 이화주 몇 숟가락 떠먹으면, 알싸하게 차오르는 취기가 마냥 즐거워서 거렁뱅이가 된다 해도 후회는 없다.
천재 음악가의 즉흥 연주곡처럼 변주가 가능한 게 우리 술의 매력이다. “숙성한 지 3일 되기 전에 믹서에 갈면 색다른 목 넘김이 돋보이는 술이 탄생하는데, 여기다가 딸기를 넣어 마저 갈면 아름다운 분홍빛 술이 태어난다.” 그가 내민 딸기 간 술은 시큼하면서 달곰한 맛이다. 그가 또 마술을 펼쳤다. 뻥튀기로 만든 술을 건넸다. 알코올 향 나는 단 과자 같다. “뻥튀기를 으깬 다음 물, 시판용 식혜와 효모를 섞어 숙성하면 완성이다.”
그는 백설기로 술 만드는 법도 알려줬다. 밥 대신 백설기를 으깨 사용하면 된다. 엿기름물 대신 시판용 식혜를 선택하면 별미를 맛볼 수 있다. 효모는 마트나 온라인 쇼핑몰에 판다. 안 원장은 “제빵용 이스트를 사용해도 충분하다. 초보자의 도전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한다. 단호박 백설기가 재료면 노란빛 술이 완성된다. 사납지 않은 신맛이 일품이다.
<규합총서>엔 이슬을 받아 술을 빚은 선조들의 얘기가 나온다. 술은 과하지 않게 마시면 궁극의 낭만을 선사하는 식품이다. 시인 천상병은 그의 시 ‘막걸리’에서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고, 즐거움을 더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했다. 정씨와 지우 엄마도 집에서 술을 빚으면서 주신의 은총을 받은 것일까? 정씨는 말했다. “집에서 담그니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어 더없이 좋았다. 양조 과정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의외로 과학적이더라. 만든 술을 지인들에게 나눠 주니 그 또한 큰 기쁨이었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집에서 만들기 쉬운 가양주 제조법.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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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옥 원장이 알려주는 두 가지 쉬운 가양주 제조법
밥술
재료:멥쌀 3컵, 물 6.5컵, 엿기름 2컵, 효모 1작은술, 설탕 2큰술
만들기
① 멥쌀과 물 1.5컵을 섞어 30분 불린 다음 밥 짓는다. ② 엿기름과 나머지 물을 섞는다. 온도를 55℃로 유지한 후 2시간 식힌다. ③ 효모와 설탕을 마저 넣는다. 설탕은 식히기 전에 넣어도 된다.
백설기 술
재료: 백설기 600g, 누룩 50g, 물 0.7~1.5ℓ(혹은 시판용 식혜 1.5ℓ, 효모 1작은술)
만들기
① 백설기를 으깬다. ② 누룩과 물을 섞은 물을 ①에 뿌린다. 혹은 시판용 식혜를 ①에 뿌린 다음 식으면 효모를 넣는다. ③ 숙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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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간단한 가양주 제조 팁
● 완성한 후 숙성을 위해 술 담는 통은 새것이 좋다. 김치 등을 담았던 통은 절대 금물.
● 설탕은 넣어도, 안 넣어도 상관없다. 단맛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 통에 담을 때는 통의 70%만 차게 한다. 너무 채우면 발효과정에서 넘친다.
● 알루미늄 포일로 통을 싸서 보관하면 더 좋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