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사막으로 둘러싸인 오아시스, 우아카치나 마을 전경. 사진 노동효 제공
‘고대 잉카문명’이라고 하지만 아주 오래된 문명은 아니다. 고려 중엽인 13세기에 시작해서 조선 초에 해당하는 16세기에 멸망했다. 그들은 마추픽추를 비롯해 수많은 거석 건축물을 남겼다. 300년만에 가능했을까? 남미 출신 고고학자 중엔 잉카의 거석 건축물이 더 이른 문명에서 건설되었고 잉카인은 그 위에 집을 짓고 산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실제 페루 해안과 계곡을 따라 여러 문명이 탄생하고 소멸했다. 1000년 전의 모체 문명, 2000년 전의 와리 문명,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파라카스 문명까지. 파라카스 해안에선 고대 미라가 발견되었다. 두개골을 연 흔적이 있었다. 죽은 후 두개골을 연 것이 아니라 수술 자욱이 아문 후에도 살아있었다는 게 밝혀졌다. 왜 두개골을 열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태평양에 인접한 파라카스는 바람에 휩싸여 있었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우당탕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장이 내려앉았다. 2층 침대의 아래층에 있길 망정이지. 호스텔 주인이 신축 중이던 옆 건물 벽이 돌풍에 무너졌다며 방을 옮겨주었다. 옥상으로 올라갔다. 사막 저편의 동쪽 하늘이 누렜다. 옆에 서 있던 직원이 말했다.
“내일쯤엔 모래폭풍이 파라카스를 덮칠 거야.”
사막 언덕에서 해넘이를 기다리는 여행자들. 사진 노동효 제공
페루의 갈라파고스로 불리는 바예스타 섬으로 가는 뱃길은 풍랑 때문에 끊어졌다. 목적지를 잃었으니 길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카를 거쳐 나스카로 가자.
다음날 늦은 오후 사막 가운데 있는 이카에 도착했다. 근교에 휴양지로 유명한 오아시스 마을이 있다고 했다. 터미널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우아카치나로 갑시다!” 15분 정도 달렸을까? 언덕을 넘자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구들 사이로 숨겨진(우아카치나는 케추아어로 ‘숨겨진’이란 뜻) 오아시스였다. 콘크리트로 지은 호텔, 카페, 레스토랑이 호수를 둘러싼 모습을 제외하면 어릴 적 상상했던 오아시스(사막 가운데 야자수가 숲을 이루고 호수가 있는 곳) 그대로였다.
숙소를 잡고 마당으로 나왔다. 앞으론 호수, 뒤쪽으론 모래언덕이었다. 뒷문을 통해 모래언덕에 오르기 시작했다. 호수 건너편에선 관광객이 샌드보드를 타거나 버기카(모래땅이나 고르지 못한 곳에서 달릴 수 있게 만든 차)를 타며 액티비티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모래 산 정상에 올라 파라카스로 향하는 폭풍의 꽁무니를 바라보았다. 사막이 멎는 서쪽에 태평양이 있겠지만 바다가 보이진 않았다. 와! 선글라스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감탄사를 내지르곤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샌드보드로 썰매를 타는 페루 소년. 사진 노동효 제공
“저기 노랗게 물든 하늘은 모래폭풍 때문이야, 파라카스 쪽을 덮치겠군.”
“나도 알아. 어제까지 저곳에 있었거든.”
“잘 빠져나왔구나. 사막은 에너지로 가득해.”
“만물은 에너지를 갖고 있지, 동양에선 ‘기’라고 해.”
“난 아마존에서 왔어. 이름은 엘톤.”
“난 한국에서 온 로. 너는 휴가 중이니?”
“아니. 우린 밤의 사막에서 의식을 치를 거야.”
“파티라도 열리니?”
“달이 뜨면 정령에게 기도하고 산페드로를 마실 거야.”
“선인장으로 만든 약?”
“산페드로가 뭔지 아는구나!”
해발 2000m 이상 안데스 산지에서 자라는 산페드로 선인장. 사진 노동효 제공
알다마다. 나는 그 선인장의 생김새부터 산페드로 조제법까지 알고 있었다. 사연은 이렇다. 잉카의 옛 수도 쿠스코에서 마추픽추로 이어지는 ‘성스러운 계곡’. 원주민 마을에서 묵으며 마추픽추로 가던 길이었다. 하루는 브라질 출신으로 아프리카 악기를 만드는 사내의 집에서 묵었는데 마당에 솥을 놓고 불을 지피는 커플이 있었다.
“안녕, 무슨 요리를 하니?”
“산페드로를 달이는 거야. 아마존에선 아야와스카, 안데스에선 산페드로로 약을 지어.”
“어디에 쓰는 약인데? 두통? 신경통? 독감?”
“몸이 아니라 정신을 위한 약이야. 환각을 일으키지만 쾌락이 목적은 아냐. 영혼이 길을 잃을 때만 마셔. 묻고 싶은 질문에 집중하고 마시면 수호신이 나타나 길을 알려주지.”
“나도 마실 수 있니?”
“사흘간 단식을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다 토하거든. 우린 새벽에 잉카 사원에서 마실 거야. 영적 에너지로 가득한 곳이거든.”
사막에서 버기카를 타는 관광객. 사진 노동효 제공
마당 곳곳에 선인장이 자라고 있었다. 생김새를 알게 된 후 안데스 시장에서도 그 선인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원주민 사이에선 3000년에 걸쳐 전해온 영약으로 ‘성 베드로’(San Pedro)란 별명이 붙은 건 예수가 베드로에게 했던 말씀 때문이었다.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라.” 환각의 정체가 밝혀진 건 20세기 이후다. 안데스에서 자라는 선인장에 함유된 메스칼린 성분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로부터 산페드로 조제법을 익혀뒀지만 사용할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내 영혼이 길을 잃는 일은 없었기에. 그러나 그 약을 마시면 무엇을 보게 될지 궁금했던 건 사실이다.
“엘톤 사막의 의식에 내가 참여해도 되니?”
“여자친구에게 물어볼게. 그녀는 샤먼(Shaman)이야. 오늘 밤의 의식을 주관할 거야. 저녁 8시 서점 앞으로 와. 다른 형제들도 그 시간에 모일 테니까.”
사막의 해가 저물었다. 미명이 사라지면 금세 캄캄해질 것이다. 언덕에서 엘톤과 헤어졌다. 그는 능선을 따라 사라졌고, 나는 숙소로 구르듯 내려왔다. 숙소 직원이 우아카치나 호수에 얽힌 전설을 들려주었다.
“옛날에 원주민 공주가 거울을 보다가 뒤에서 자신을 해치려는 자를 발견했어. 공주는 거울 속으로 도망쳤고, 거울은 호수로 변했지. 공주는 매년 남자 한명을 물 밑으로 끌어들여.” 우아카치나 호수의 표면 온도는 따뜻하지만, 밑엔 차가운 지하수가 흐르기 때문에 다리에 쥐가 나고 익사 사고가 잦아 생긴 풍문이었다.
30분 일찍 서점 앞으로 갔다. 엘톤이 보이지 않았지만, 사막으로 함께 갈 친구들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여느 관광객과 달랐으니까. 넝마 같은 차림에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친구, 저글링을 하는 여자, 북을 두드리는 사내, 생각에 잠긴 안경잡이. 안경 낀 사내에게 물었다.
“엘톤을 기다리니?”
“아, 네가 한국에서 온 로구나. 엘톤도 곧 도착할 거야. 난 페르난도, 칠레에서 왔어. 여기 온 지는 2년쯤 됐지.”
“2년째 머물고 있다고?”
“난 소설가야. 이카의 돌에 관해 쓰는 중이지.”
“이카의 돌?”
나스카 라인을 새겨넣은 이카 스톤 모조품. 사진 노동효 제공
“이카에선 유명한 얘기야. 외과의사 카브레라가 한 농부를 치료해줬어. 농부는 답례로 이카 사막에서 주운 돌을 선물했지. 카브레라 박사는 돌의 문양이 실존했던 익룡 화석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농부로부터 돌을 사들이기 시작했지. 문양이 새겨진 돌은 손톱만 한 것부터 수백 킬로그램까지 1만2천개에 달했어. 박사는 공룡과 공존한 고대문명이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했지. 당시의 식물, 공룡의 성장 과정, 대륙이동 이전의 지도까지 그려져 있었으니까.”
“농부가 새겨서 박사에게 판 거겠지.”
“페루 정부도 농부가 돌에 그림을 새기고 닭장에 뒀다가 박사에게 판 거라고 발표했어. 실은 유물을 발견하고 사적으로 취하면 중벌에 처하니까 사기죄를 선택한 거야. 단단한 안산암에 1만개 넘는 그림을 새기는 건 온 가족을 다 동원해도 불가능해. 더구나 지구과학, 동물학, 해부학 지식이 없으면 알 수 없는 내용이었어. 박사는 돌의 분석을 의뢰했고 지질학자들이 결과를 내놓았지. 돌의 생성연대는 2억2000만년 전, 그림을 새긴 건 최소 1만2000년 전이었어. 정설을 따르자면 인류가 베링해협을 건너 알래스카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가 대략 1만년 전인데, 남아메리카에선 이미 고대문명이 한차례 지나간 거야. 당대 인간은 늘 당대 과학의 정점에 있으므로 자신이 배운 게 옳다고 여기지. 현생 인류가 출현한 건 몇만년 전이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당연한 사실이 밝혀진 건 고작 500년밖에 되지 않아.”
산페드로 선인장을 달이는 사람들. 사진 노동효 제공
오아시스를 찾아 사막의 마을로 들어섰다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 같았다. 엘톤이 나타났다. 옆엔 무녀(巫女)라던 여자친구가 서 있었다. 눈빛만으로 그녀가 파울로 코엘료의 <브리다>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잇는 다리’ 위에 서 있는 존재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도 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시티(CT) 영상 촬영기가 영혼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가 엘톤에게 얼굴을 돌리더니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동행해도 좋다는 승낙이었다.
<다음회에 계속>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