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 영어, 한국어가 섞여 쓰이는 향수 홍보 자료를 보면 머리가 아프다. 우리말로 모두 바꿔 쓰면 향수가 더 쉬워질까? 인공지능 조향 프로그램이 향수를 만드는 세상. 조향사는 일자리를 잃지 않을까? 궁금했던 향수 산업을 더듬어 봤다.
♥ 잘못 번역하면 고사리 향수 됩니다
‘뮤게를 메인으로 신선한 릴리 오브 더 밸리와 청아한 은방울꽃이 어우러진 향기.’ 평소 향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장을 읽고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은방울꽃의 프랑스어가 뮤게(muguet), 영문명이 ‘릴리 오브 더 밸리’(Lily Of The Valley)다. 역시 향수에 많이 쓰는 오스만투스(Osmanthus)는 세계사 수업시간에 주워들은 ‘오스만 튀르크’부터 떠오르게 한다. ‘터키와 관련이 있는 향료인가?’ 넘겨짚었으나, 가을 무렵 달콤한 살구향이 풍기는 노란 꽃을 피우는 금목서를 말한다. 향의 계열이나 원료를 우리말로 옮기면 외국어로 도배하다시피 하는 향수의 세계를 이해하기가 쉬워질까? 꼭 그렇지는 않다. 향수 관련 번역서를 읽다가 원료 중에 ‘양아욱’이 등장해 국어사전을 뒤졌다. 제라늄이었다.
60대 여성 킬러 ‘조각’의 이야기를 담은 구병모 작가의 <파과>는 냄새 표현이 도드라지는 소설이다. 고기 누린내와 마늘 냄새가 풍기는 금요일 밤의 전철이나, 농익은 복숭아, 럭키치약과 코티벌꿀비누, 발로 밟아 뭉개진 귤 등 조각이 맡는 다양한 냄새를 머릿속에 그리며 이따금 번역서 페이지를 넘기는 일을 잊기도 했다. 조각은 같은 일에 종사하는 30대 남자 ‘투우’를 향으로 감지한다. 투우가 나타나기 전에 콧속을 간질이는 ‘푸제르 계열’의 향기를 먼저 맡는다. 푸제르(Fougère)는 번역하면 고사리류다. 명품 양복을 입는 30대 남성 킬러가 고사리 향을 풍긴다고 하면 어쩐지 좀 이상하다.
“업계에서 ‘푸제르’는 우디, 발삼 등 여러 가지 원료가 섞인 남성용 아로마틱 계열을 말한다. 향수 브랜드 수입사 판매원이 잘못 교육을 받고는 번역대로 ‘푸제르 향수 노트(note·향이 갖는 성격)는 고사리 향’이라고 소개한 적도 있다.” 조향 연구소 살롱 드 느바에의 조향사 ‘느바에(예명)’씨의 설명이다. 라벤더와 파촐리, 오크모스(떡갈나무에 붙어사는 지의류. 축축한 나무 이끼 향), 달콤한 향이 나는 합성 쿠마린의 조합이 푸제르 계열 향수에 주로 쓰인다. 1882년께 프랑스 조향사 장프랑수아 우비강이 만든 향수 ‘푸제르 로열’이 시초로, 고사리가 자라는 숲을 이미지화한 것뿐이다. 강인한 이미지의 성인 남성에게 어울릴 법한 향이다. 보통 ’남자 스킨로션 냄새’로 인지하는 향수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한다. 푸제르 계열을 고사리라고 번역하거나 주석을 붙였다면 불필요한 오해가 생긴다. <파과>를 읽다 물음표로 남겼던 향엔 이제 느낌표가 달렸다.
2010년 재출시된 ‘푸제르 로열’. 푸제르는 고사리란 뜻. 하지만 고사리 향은 나지 않는다. 사진 우비강 누리집
♥ 조향사도 인공지능으로 대체될까?
‘향수는 보이지 않는 옷이다. 또한 감춰진 것과 드러난 것 사이의 숨바꼭질이다.’ 1828년께 설립한 프랑스 향수의 명가 겔랑 가문의 4대 장 폴 겔랑의 자서전 <장 폴 겔랑 향수의 여정> 중 한 대목이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향수 ‘삼사라’를 만들었다. 삼사라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면 그녀가 어디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로맨틱한 이야기다. 그가 사랑한 여성들을 위해 계속 특정 향수를 만드는 통에 감흥은 식긴 했지만, 조향사에 대한 호기심은 오히려 커졌다. 3000여가지 향료를 기억해 구분하는 장 폴 겔랑. 그는 책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향수 공식에 얽힌 추억을 얘기하고 최고의 향료를 찾으러 간 산지 여행을 추억한다.
겔랑과 샤넬, 디오르와 에르메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글로벌 패션‧코스메틱 업체는 ‘하우스 퍼퓨머’(전속 조향사)를 두지 않는다. 주로 외주를 맡기는 식이다. 글로벌 뷰티 기업 코티는 구찌, 버버리, 캘빈 클라인, 티파니 앤 코 등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세계적인 향료‧향수 원료업체인 스위스의 지보단, 미국의 아이에프에프(IFF) 등에 향 개발을 의뢰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량생산 향수를 매스(mass) 향수, 혹은 라이선스 향수라고 칭한다. 소량 생산을 지향하는 향수, 퍼뮤머리(향수 제조소)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향수를 ‘니치 퍼퓨머리’(Niche Perfumery) 향수로 분류한다.
글로벌 향료기업은 자연 향 원료의 수집부터 합성향료의 개발과 생산까지 주도한다. 지금은 기계나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이기도하다. 이런 업계와 시대에서 조향사는 여전히 낭만적인 창조자일 수 있을까?
조향사를 보조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 ‘카르토’를 활용해 만든 향수 ‘쉬 워즈 언 어노멀리’. 사진 에타 리브르 도랑주 누리집
‘필리라’(Philyra)는 아이비엠(IBM)과 독일 향료기업 심라이즈가 개발한 향료 제조용 인공지능의 이름이다. 2019년 11월 필리라는 심라이즈의 조향사들과 함께 베를린 시민 4300여명의 향기 취향을 반영한 향수 ‘#베를린(Berlin) 3.0’을 만들었다. 2019년 4월엔 스위스 지보단이 조향사를 보조하는 대화식 인공지능 시스템 ‘카르토’(Carto)를 발표했다.
인공지능이 만든 향수는 어떤 향기가 날까. 지난 19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메종 드 파팡’을 방문했다. 2013년부터 독창적인 향수를 선별해 소개해 온 그곳에서 찾던 향수를 만날 수 있었다. 프랑스 퍼퓨머리 ‘에타 리브르 도랑주’에서 2019년께 내놓은 ‘쉬 워즈 언 어노멀리’(She was an Anomaly)다. 지보단의 카르토를 활용해 자신만의 ‘포뮬러’(향의 공식)로 이 향수를 개발한 조향사 다니엘라 안드리어는 자사 누리집에서 “카르토에게 대중이 사랑하고 친숙한 노트를 주자, 카르토는 아이리스와 머스크 두 가지 원료의 과량투여를 제안했다”고 밝혔다. 얼마나 많은 원료를 넣었을까 긴장하면서 시향해본 결과, 세상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누구나 좋아하는 요소를 찾는 것은 빅데이터가 하는 일이다. 하지만 특별한 1%는 조향사가 만든다.” 메종 드 파팡 김승훈 대표의 말이다. “아무리 향을 자동으로 조향해주는 자판기가 나와서 보급이 된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과 감동을 주는 중독성 있는 대작들은 조향사의 손에 의해서 나올 수밖에 없다.” 많은 데이터를 단시간에 습득하는 인공지능의 학습능력이 인간을 뛰어넘어도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상품은 아직, 인간의 손에서 나온다.
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
향수 리뷰 유튜브 ‘미지의 세계’. 유튜브 화면 갈무리
[ESC] ‘향알못’→‘향덕’
향수에 대한 정보를 주로 얻는 매체가 잡지였던 시절이 있었다. 몇 페이지만 넘기면 배우와 모델을 주인공으로 한 패션 브랜드의 향수 이미지 광고를 접할 수 있었다. 요즘은 어떨까? 내학내일 20대 연구소가 15~34살 여성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하는 ‘데이터 클리’의 뷰티 카테고리를 살폈다. ‘뷰티제품 관련 정보 주요 접촉처’를 묻는 질문에 2년 전엔 4위에 그쳤던 유튜브 채널이 최근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 중 40%를 차지하는 1위에 올랐다. 그 뒤로 인스타그램과 주변 지인, 친구가 뒤를 잇는다. ‘최근 구매한 뷰티 제품’을 묻는 질문에 ’향수’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최근 관심 있는 뷰티제품’을 묻는 항목에서는 높은 순위였다. 종합하면, 향수는 자주 사는 뷰티 제품은 아니지만, 관심은 커진 제품이라는 것이다.
향수가 주요 콘텐츠인 유튜브 채널을 살피다 ‘현실적이고 적나라하게’ 향수를 리뷰하는 <미지의 세계>를 만났다. 드러그스토어에서 쉽게 접하는 저렴한 가격대 향수부터 톰 포드 같은 고가 제품까지 다룬다. 주변 반응이 좋지 않았던 향수뿐만 아니라 곰팡이, 유리세정제, 치과, 주유소 등 특정 냄새를 떠올리게 하는 향수처럼 흥미로운 주제도 있다. 무엇보다 어려운 향수의 세계를 설명할 때 이해하기 쉬운 기준을 제시하며 찰떡같은 비유로 표현하는 것이 강점이다. 향수 경험치가 쌓이지 않은 ‘향알못’(향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부터 좋아하는 향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는 ‘향덕’(향수 덕후)까지 만족할 만한 채널이다.
유선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