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전남 해남 달마산 도솔암. 완도에서 온 김종배씨가 도솔암에 올라 담장 밖을 내려다보고 있다. 김선식 기자
길에서 호기심을 잃은 지 오래다. 대여섯살 아이들이 길을 한 바퀴 돌아서 가고 싶다고 말하면 ‘지름길 놔두고 왜?’라는 생각부터 든다. 학창시절 ‘집에서 호수까지 가는 최단거리 구하기’ 수학 문제를 너무 여러 번 풀어서일까. 모든 게 시간 강박 때문이다. 아이를 설득하고 달랠 시간에 차라리 좀 더 걸으면 될 일인데 말이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엔 꽤 걸었다. 동네 ‘나쁜’ 형들 따라 집에서 10㎞ 떨어진 대전 계족산 계곡까지 무작정 걸어갔다. 가재 잡으러 간 길이었다. 유난히 왁자지껄했던 개구리 울음소리만 귓가에 맴돈다. 저녁 늦게 집에 돌아가 “거길 무엇하러 따라갔냐”는 소리를 들으며 호되게 야단맞은 기억은 생생하다.
걷기도 사색만큼이나 쓸데없다. 쉬는 것도 일하는 것도 아닌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가끔 쉬기도 일하기도 싫은 날 오래 걷곤 했다. 서울 강남에서 한강 건너 용산까지 걷고, 용산에서 중랑천까지 바람 따라 걸었다. 한강에서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 수수하게 빛나는 갈대숲, 우연히 다다른 강변 오솔길을 발견하곤 소소한 기쁨을 느꼈다. 걷는 리듬감은 마음을 몸에 가뒀다. 반사적이고 규칙적인 움직임에 생각은 흐트러질 틈이 없었다. 걷고 나서 정신이 또렷해진 기분이 든 이유다.
지난 10일 전남 해남 달마고도. 김선식 기자
무위(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 가까운 걷기가 요즘 칭송받는다. 온·오프라인 시공간이 단축되면서 걷기가 희귀상품이라도 된 걸까. 영화배우도 시장·군수들도 독일, 일본, 핀란드 등 외국에서도 걷기를 예찬한다. 지자체들은 너도나도 ‘걷기 좋은 길’을 만든다.
땅끝 해남에 달마산 산등성이를 둘러가는 기다란 길이 있다. 2017년 11월 개통한 ‘달마고도’(17.74㎞)다. 최소한만 손을 대 최대한 자연과 어울리도록 길을 냈다. 여느 여행지에서나 볼 수 있는 장황한 지명 표지판은 이 길에 없다. 그 흔한 데크(목제 길)도 없다. 오직 방향과 남은 거리만 일러주고 돌멩이로 길의 경계만 표시한다. 군더더기 없는 길은 시간을 창조했다. 정확한 현재 위치를 알고 싶은 조바심은 내려놓고 길과 숲, 공기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달마고도는 절벽 끝자락에 자리를 튼 도솔암을 품고 있다. 옛 정취 그대로 간직한 도솔암 가는 길은 땅끝에서 하늘 끝으로 오르는 듯 신비로웠다.
지난 11일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보죽산에서 바라본 바다. 김선식 기자
고산 윤선도가 첫눈에 반하고 은거하며 풍류를 즐긴 전남 완도군 ‘보길도’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길이 있다. 지난해 6월 개통한 ‘어부사시사 명상길’(5.2㎞)이다. 보길도 남쪽 해안 절벽을 따라 길을 다듬었다. 난대림 숲을 헤매다 보면 시시때때로 드넓은 남쪽 바다가 펼쳐졌다. 푸르고 적막한 어둠의 숲 터널을 지나면 깎아지른 절벽 내리막길이 나왔다. 짧고 몽환적인 길이었다. 때로 걷기 힘겨워 ‘어서 이 길이 끝났으면’ 하는 바람도 들었다. ‘자연미의 시인’ 윤선도가 그 길을 걸었다면 뭐라고 노래했을까. ‘풍류도 쉽지 않도다. 지나온 길 감회가 깊어야 더 즐거운 걸 그 뉘 알꼬’라 했을까. 지난 10~11일 달마고도와 어부사시사 명상길에 다녀왔다. 바야흐로 걷기 좋은 날이다.
지난 11일 보길도 ‘어부사시사 명상길’. 김선식 기자
해남·완도(전남)/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