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카르타헤나 거리 풍경. 사진 노동효 제공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에 아메리카 대륙이 없었다고 가정해 보자. 1492년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서쪽으로 향하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일본에 닿았다. 그는 인도의 서쪽 섬이라고 확신했고, 본토인 한반도에는 금은이 가득하다고 스페인 왕에게 알렸다. 황금에 눈먼 스페인 왕은 군대를 보내 조선의 왕을 납치, 금을 내놓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 보물을 약탈한 후 왕을 살해했다. 정복자들은 여인들을 강제로 범했고, 그들의 몸과 의복에 묻어온 콜레라, 홍역 등 세균까지 합세해 한반도 인구 대부분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살아남은 백성은 강원도 광산으로 끌려가 죽을 때까지 일했고, 캐낸 금은은 스페인으로 보냈다. 마구잡이로 살상하고 약탈한 후 그들이 말했다. 우리가 한반도를 발견했다니까!
15세기 말 한반도에 배달민족이 살고 있었던 것처럼 아메리카에도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발견, 아니 아메리카 침략(!)으로 대륙에서 살던 7300만명의 원주민 중 95%에 달하는 6950만명이 지구상에서 사라졌고 5%가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이들은 광산과 농장에서 중노동으로 죽어갔고, 캐낸 재화는 카리브해 연안으로 옮겨진 후 선박에 실려 스페인으로 보내졌다.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거둬들인 금은의 양은 막대했다. 연간 5톤에서 10톤으로, 15톤으로 불어나자 불안해진 유럽 열강은 스페인으로 향하는 재화를 탈취하기 위해 자국 상선에게 사략허가증(적선을 약탈할 수 있는 허가증으로서 약탈품의 일부는 세금으로 바친다)을 팔았다. ‘해적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스페인 입장에선 해적이지만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입장에선 국익에 앞장서는 일꾼이었다. 사략선에 탄 이들은 필요에 따라 해군과 해적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그들 중 가장 출세한 인물은 드레이크였다. 영국 출신 노예상인이었던 그가 영국 왕실에 갖다 바친 약탈금은 왕실 1년 예산과 맞먹을 정도였다. 덕분에 기사 작위를 받고 해군 제독의 지위에까지 올랐다나. 지금도 스페인에선 해적 드레이크라 부르고 영국에선 드레이크경(Sir Drake)이라 부른다.
드레이크, 모건, 블랙비어드 등 해적들이 카리브해를 헤집고 다니던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초 카리브해엔 온갖 재화가 오가고 노예시장이 서는 도시가 많았다. 가장 번성했던 도시 중 하나가 ‘카르타헤나데인디아스’(Cartagena de indias)다.
스페인으로부터 콜롬비아를 독립시킨 볼리바르 동상. 사진 노동효 제공
당시 카리브해를 오가는 상인들의 무역 중심지이자 남아메리카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카라카스(현재 베네수엘라의 수도) 출신의 볼리바르가 스페인령 남아메리카를 해방하고 보고타가 독립한 콜롬비아의 수도가 되면서 ‘영광의 도시’(La Heroica)로 불리던 카르타헤나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로부터 200년.
콜롬비아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부터 카르타헤나에 꼭 가보라는 얘기를 들었다. 볼리비아에서 만난 후아니토 신부는 자신이 사제 수업을 받던 카르타헤나에 대해서 말할라치면 “무이 에르모사!”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스페인어로 ‘굉장히 아름답다’는 말인데 얼마나 자주 들었던지 나중엔 카르타헤나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이거나 후아니토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느라 헤어지고 말았던 여인의 이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가던 카르타헤나가 아메리카 바깥사람들의 눈에 다시 들어온 건 21세기 들어서다. 먼저 영화 촬영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국에 개봉은 안 했지만, 마이크 뉴얼이 영화화한 <콜레라 시대의 사랑>(2007), 소피 마르소와 크리스토퍼 램버트 주연의 <카르타헤나>(2009)를 비롯한 최근 한국에서도 개봉한 <제미니 맨>(2019)에서 윌 스미스가 자신의 디엔에이(DNA)로 복제한 킬러와 처음 조우하는 장면도 카르타헤나에서 촬영되었다.
전통의상을 입고 전통춤을 추는 콜롬비아 시민. 사진 노동효 제공
사실 콜롬비아의 도시들은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다. 1901년 콜롬비아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에서 벌어진 ‘천일 전쟁’을 시작으로 20세기 내내 콜롬비아 관련 뉴스에선 반군, 내전, 강도, 마약이란 단어가 빠지지 않았기에 방문이 꺼려지는 게 사실이었다. 나 역시 20세기 말 유럽에서 만난 콜롬비아 친구로부터 경고를 들었다. “우리나라엔 가지 마. 피부색 다른 너는 척 봐도 관광객이고, 관광객은 도착 첫날 다 털려. 재밌는 얘길 해줄까? 콜롬비아 마피아는 협박할 때도 문학적 수사를 사용해. 내 아버지 가게를 넘기라고 할 때도 이렇게 말했지. 이봐,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네 아내는 내일 과부로 불리게 될 거야.” 내전이 막을 내린 건 불과 4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막후역할을 한 끝에 콜롬비아 대통령과 반군 사령관이 2016년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장소는 카르타헤나.
카르타헤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콜롬비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젊은 날을 보낸 도시이기도 하다. 카리브해에서 머잖은 아라카타카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보고타에서 잠깐 대학을 다녔지만, 그 도시를 좋아하진 않았다. 아열대 기후에서 자란 그에게 안데스 기슭의 높고 선선한 보고타는 춥고 칙칙한 도시였다. 암살, 시위, 폭동이 이어지자 그는 카르타헤나 소재 대학으로 편입했고 20대의 많은 날을 카리브해와 접한 카르타헤나와 바랑키야를 오가며 보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도 이 도시들이 배경이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 ‘마콘도’라는 가상의 마을에서 전개되는 것처럼 <콜레라 시대의 사랑>는 두 도시를 뒤섞어 놓은 가상의 항구도시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카르타헤나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시계탑(토레델레로흐). 사진 노동효 제공
말년에 그는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라는 자서전을 냈는데, 책 속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전신기사로 일했던 그의 아버지가 카르타헤나에서 문맹자에게 연애편지와 서류를 대필해 주는 대서인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는 것. 그건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주인공 플로렌티노의 모습이었다. 플로렌티노는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페르미나가 다른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자 ‘나의 사랑이 끝났구나!’ 하고 포기하는 대신 남편이 죽기를 51년 9개월 4일을 기다린 끝에 다시 사랑 고백을 하는 인물. 플로렌티노는 젊은 시절 전신기사로, 연애편지 대서인으로 일했다. 여자의 아버지는 플로렌티노가 가난한 전신기사란 이유로 딸과 사귀는 것을 원치 않았고, 딸을 촉망받는 의사와 결혼시켰다. 어머니의 남편감으로 아버지를 탐탁잖게 여겼다던 마르케스의 외할아버지와 겹쳤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먼저 결혼했더라면, 하는 가정에서 출발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수백년의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는 도시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쉽지 않다. 소설, 영화 등 문화적 소재들이 너무 풍부한 도시라면 더더욱. 명소에 대해 세세히 말할 지면이 부족하다. 그리고 어떤 도시는 명소보다 도시에 얽힌 인물과 이야기가 더 흥미로운 곳도 있다. 카르타헤나가 그런 곳이다. 마르케스에게 카르타헤나는 ‘고독과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세계이자 ‘그곳에 도착했다는 무한한 감동’을 안겨준 도시였다. 그리고 <콜레라 시대의 사랑>, <족장의 가을>, <사랑과 다른 악마들> 등 훗날 그가 쓰게 될 작품들에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가 되었다.
카르타헤나 성벽 위에서 카르브해로 지는 일몰을 바라보는 사람들. 사진 노동효 제공
카르타하네에 가면 해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성벽, 스페인 식민지풍의 건물, 성당들, 시계탑 광장으로 이어지는 구시가지를 걷게 될 것이다. 원색의 페인트를 칠한 건물들, 집과 집을 잇는 나무 덩굴, 말들의 경쾌한 발굽 소리, 성당의 종소리 등. 카르타헤나를 현재 콜롬비아에서 가장 각광 받는 관광도시로 만든 건 세인들에게 잊혔던 긴 고독의 시간이었다.
중남미 전설에 따르면 지구는 원래 흑백밖에 없는 세상이었는데, 신이 보기에 너무 지루해서 여러 사물에서 빛을 뽑아내 다시 색을 칠했다고 한다. 그중 소년들의 웃음에서 추출했다는 노란색은 이 도시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색이다. 노랗게 칠한 건물과 담벼락이 연이은 거리. 그래서 마르케스의 소설엔 노란 나비가 자주 날아다녔던 걸까?
성벽 위에서 카리브해로 저무는 일몰을 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마르케스가 살던 집을 지나는데 호텔 담에 씌어있는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의 문장이 여행자의 심금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다. ‘인생에서 텅 빈 침대보다 더 슬픈 곳은 결코 없다.’ 물론 호텔 주인장에게도 그러하리라.
글·사진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