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이라고 불리우던 작업실 겸 사랑방. 사진 'Courtesy of the Louis Amstrong House Museum' 제공
‘나무들은 우거지고, 장미는 붉게 물들어/ 바로 당신과 날 위해 피어납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옆집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어느새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죠/ 그 아이들은 내가 절대 알 수 없었던 것들을 배우겠지요/ 그래서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하고요’ (노래 ‘왓 어 원더풀 월드’ 가사 일부)
뉴욕 퀸즈의 평범한 동네인 코로나(Corona). 그 언저리에 루이 암스트롱의 집이 있다. 반려자 루실과 함께 인생 후반 30여년을 보냈던 집 정원에는 한겨울임에도 푸르름이 가득했다. 만병초나 주목, 소나무 같은 상록수들이 그의 익살맞은 함박웃음 마냥 따뜻한 볕을 받고 있었다. 한구석에는 소박한 바비큐 시설과 의자들이 놓여있어, 이곳에서 열렸던 작은 파티들과 볼을 맞대고 춤을 추면서 천국을 느꼈을 시간을 상상하게 한다. 엘라 피츠제럴드와 함께 불렀던 ‘댄싱 칙 투 칙’(Dancing Cheek to Cheek)을 자연스럽게 입안에서 흥얼거리게 된다. 이곳은 흔히 연상되는 유명 연예인의 호화 저택과는 거리가 멀다. 옆집과 뒷집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원, 우리가 그저 쉽게 만날 수 있는 동네 아저씨와 아줌마의 공간이다. 일단, 코로나라는 곳 자체가 전혀 특별한 것이 없는 동네다.
덴에서의 루이 암스트롱. 사진 'Courtesy of the Louis Amstrong House Museum' 제공
1년 내내 미국 전역과 해외 공연이 많았던 루이 암스트롱은 사실 떠돌며 사는 신세였다. (1960년대 초 한국에 온 적도 있다.) 집은 결혼 전 아내 루실이 구입해 둔 것이다. 1943년 결혼 후 아내는 남편에게 그냥 자기 집으로 들어와 살 것을 제안했다. 남은 은행 대출을 책임지라는 조건이었다. 암스트롱은 그즈음 이미 백만장자였다. (당시 재즈 연주자의 하루 출연료가 대개 70~80불일 때, 1000불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부부는 화려한 저택 대신 코로나라는 지극히 평범한 동네에 있는 너무나도 평범한 주택을 선택했다. 물론 당시는 흑인들이 맨해튼의 고급 아파트나 백인 지역에서 살 수 없던 시기이기도 했다. ‘바나나 보트 송’(Banana Boat Song)으로 역사상 최초로 음반 판매 백만장 돌파 기록을 세운 흑인 가수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 역시 번번이 맨해튼 아파트 입주를 거부당하던 시절이다. 격분한 그가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한 아파트 건물을 통째로 구입해 버렸는데, 그게 1950년대 말의 사정이다.
루이 암스트롱은 흑인이 백인의 심기를 거스를 만큼의 사치를 누리면 위험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내 루실이 태어나고 자라 너무도 친숙한 곳, 곳곳에 친구들이 살고 그리 잘 나지도, 못 나지도 않은 흑인들이 거주하는 코로나. 그곳의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집은 선택이라기보다, 어쩌면 그에게 얼마 남지 않은 자유의 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창문을 통해 흘러나오는 트럼펫 연주가 아니라면 누구도 루이 암스트롱이 살고 있을 거라 짐작할 수 없는 집이었다. 기존의 집을 증축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크기도 동네 표준이다. 나중에 옆집 주인이 보유세 미납으로 땅을 차압당하자 암스트롱이 그 땅을 1만달러에 낙찰받아 정원으로 넓혔다는 점만 빼면, 그의 집은 동네 여느 집과 똑같았다.
거실. 사진 'Courtesy of the Louis Amstrong House Museum' 제공
암스트롱이 추구했던 집의 모습은 가장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종종 “보통의 동네에서 보통의 이웃(regular people in a regular neighborhood)”과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를 말하곤 했다. 당시 유색인종의 평범한 행복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역설이기도 하다. 여기서 불과 5분 거리에 흑인 민권운동을 하다 암살된 맬컴 엑스의 집이 있다. 세 딸과 함께 살던 집은 그의 사망 일주일 전까지도 방화에 시달렸다. 맬컴 엑스의 부친은 백인우월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전차 바퀴에 몸뚱이가 반으로 잘린 채 발견됐다. 소수의 권리를 입 밖에 내다가는 언제 압도적 폭력에 희생될지 알 수 없는 곳이 미국 사회였다. 그러기에 노래 ‘왓 어 원더풀 월드’(What A Wonderful World)의 배경이었던 코로나의 집과 정원, 그리고 동네와 이웃들은 너무나 쉽게 파괴되어 버릴 수 있는, 너무도 쉽게 사라져 버릴 수 있는 멋진 세계였다.
그래서 루이 암스트롱 하우스는 그 존재 자체가 행복의 표현이다. 인생의 중반에 늦게 만난 연인 루실과 함께 주체적인 삶을 꾸려나갈 수 있었던 집, 외부의 테러와 편견과 차별의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는 집, 친구들과 음악을 듣고 춤을 추고 노래도 부를 수 있는 집. 그들이 이 작은 공간에 꾸미려 했던 내향적인 천국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집은 루이 암스트롱이 평생 소유한 유일한 집이었고, 아이가 없었던 부부가 둘이서 남은 평생을 함께했던 집이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약간 답답할 정도의 작은 방들로 구성된 집이지만, 집안 곳곳은 부부의 뚜렷한 취향으로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계획되어 있었다. 변화로 점철된 그들의 온 인생에서 한때 소중히 여겼던 것들로 둘러싸인, 구석구석에 이야기가 배인 집이다.
1950년대 루이 암스트롱이 거주하던 당시의 모습. 사진 'Courtesy of the Louis Amstrong House Museum' 제공
건물은 길쭉한 평면이다. 1층 현관을 들어서면 우선 왼편에 있는 거실이 보인다. 짧은 복도를 따라 가면 옷장과 작은 화장실이 나타난다. 다이닝 룸, 부엌, 그리고 마지막으로 브렉퍼스트 룸으로 이어져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먼저 길가 쪽 테라스와 이어진 작은 친목 공간인 ‘덴’(den)이 보인다. 복도를 따라서 게스트 룸과 옷장이 이어지고, 끝에는 부부의 침실과 욕실, 그 끝에는 드레스 룸이 있다. 비록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이 집의 내부 구성은 고대의 건축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전통, 즉 멀쩡한 단독 주택이라면 갖추어야 할 프라이버시(사생활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의 점증 단계를 잘 보여준다. 현관과 거실은 상당히 공적인 공간이다. 긴 장방형의 거실은 두 영역으로 나뉘는데, 서로 다른 소파로 구성돼 있다. 손님들이 오면, 남자들과 여자들이 따로 모여 수다 떠는 모습이 연상된다. 주인과의 친화도가 증가할수록 손님들은 안쪽까지 진입할 수 있다. 다이닝 룸과 옷장, 화장실, 그리고 가끔은 부엌까지. 식사 후에 몇몇 친구들은 위층의 덴에서 담소와 담배를 즐겼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늦어지면 게스트 룸에서 자고 가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집은 점점 부부만의 공간이 된다. 그 끝에는 옷을 갈아입고 치장을 하기 위한 드레싱 룸이 있다. 여기저기 벗어놓은 옷가지의 흐트러진 모습은 사실 침실보다도 더 사적인 내밀함인 것이다.
주방. 사진 'Courtesy of the Louis Amstrong House Museum' 제공
루이 암스트롱 하우스는 둘이 사는 집에 꼭 필요한 각자만의 공간을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불과 두명의 가족이라 할지라도, 개인적 고독과 조용한 시간을 보장할 공간은 더욱 중요해진다. 매사 상대방에 의해 나의 시간이 점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 집의 경우, 브렉퍼스트 룸은 온전히 아내의 공간이었다. 작은 책상과 수납장, 그리고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창문이 전부다. 책을 읽거나, 영수증을 정리하거나, 혹은 친구들과 식사 후 대화를 즐기기에 충분하다. 한편 2층의 덴은 남편이 사무실 겸 녹음작업실로 쓰던 방이다. 전화를 하고, 트럼펫 연주를 하고, 친구들이 함께 떠들며 놀던 남자들의 공간, 사랑방이기도 하다. 그는 친구들과의 대화 중 즉석에서 연주하면서 노래를 녹음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사소하게 넘기지 않아야 할 부분은, 아내의 공간이 1층의 서편 끝, 남편의 공간이 2층의 동편 끝으로서 둘의 개인적 공간이 집안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위치한다는 사실이다. 물리적 거리야 그래 봤자 얼마 안 되지만, 중요한 것은 심리적 거리감이다. 오래 살아본 커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디자인이다.
최이규(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