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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예산 하늘엔 술 취한 천사가 많다”…예산 사과 와인 이야기

등록 2020-02-01 13:42수정 2020-02-01 13:45

와인 여행도 목적인 양조장 예산사과와인
발효실, 저장고 등 투어 프로그램 인기
‘추사 40’으로 ‘2019 우리술 품평회’ 수상도 해
‘추사 로제’를 따르고 있는 정제민 부사장. 박미향 기자
‘추사 로제’를 따르고 있는 정제민 부사장. 박미향 기자

황량한 사과나무 숲에 그가 서 있었다. 좀비처럼 휘어지고 구부러진 팔을 가로로 뻗은 나뭇가지는 호시탐탐 그의 얼굴을 노리는 것 같았다. 어수룩하게 틈만 보이면 고운 뺨을 긁을 태세다. 한겨울 앙상한 사과나무는 너무 뾰족해서 위협적이다. 하지만 그는 애정이 듬뿍 담긴 표정으로 바라본다. 믿음직스럽다. 곧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그가 만든 ‘여행’을 완성할 것이기에. 농업회사법인 예산사과와인 정제민(53) 부사장을 지난 19일 충남 예산군 고덕면에 있는 은성농원에서 만났다.

■ 술맛은 여행의 시작

“이 통을 거쳐서 술이 나오는 거군요. 신기하네.” 세련된 이미혜씨가 말한다. 그는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에 있는 디자인 바 ‘꽃술’(kkotssul)의 주인이다. 아티스트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술을 즐기는 공간이 꽃술이다. 지난해 10월께 문 연 이후 이곳은 ‘핫플’로 소문이 나 찾는 20~30대가 많다고 한다. 양조 하는 이도 아닌 그가 사과로 만든 와인 ‘추사 애플 와인’, ‘추사 로제’와 사과 증류주 ‘추사 40’을 생산하는 이곳을 왜 찾은 것일까? “사과로 와인을 만드는 것도 신기한데, 여러 차례 시음했더니 반응이 뜨거웠어요.”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다.

예산사과와인은 여느 양조장과 다르다. 양조장 여행과 체험이 주목적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정 부사장은 “프랑스 보르도, 포르투갈 오비두스 등을 간 적 있는데, 거기선 술이 관광이나 농업과 연결된 문화콘텐츠였다”고 술회했다. 그는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에 있는 시드라(사과 발효주) 박물관에서 목격한 장면도 잊을 수 없다. “병을 1m 이상 들어 따르는 시드라 특유의 음용 방식 때문에 술의 반이 바닥에 떨어져 없어지는데도 사람들은 깔깔대며 웃었다.”

그는 콘텐츠 장이 되는 와이너리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2006년께 일이다.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그는 2010년께 약 4만9500㎡(약 1만5000평) 넓이의 사과농장 은성농원 한쪽에 체험관과 양조장 등을 지었다. 그해 ‘추사 애플 와인’도 출시했다. 가을엔 사과 따기, 사과 파이 만들기 등의 체험 행사도 진행했다. 그동안 외국인 포함 2만7000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농업회사법인 예산사과와인의 사과밭. 박미향 기자
농업회사법인 예산사과와인의 사과밭. 박미향 기자

‘추사 40’을 만드는 시설인 다단식 증류기. 박미향 기자
‘추사 40’을 만드는 시설인 다단식 증류기. 박미향 기자

이씨와 일행 3명은 정 부사장의 안내로 지하로 내려갔다. 발을 딛자마자 코를 확 잡아채는 큼큼한 냄새가 사람들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완성된 술을 병입하는 곳이다. 정 부사장인 차분히 한국 와인의 역사를 설명한다. 그가 이어 이끈 곳은 증류실과 발효실, 숙성 창고였다. 증류실엔 감압식 증류기와 다단식 증류기가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복잡하게 얽힌 기계 장치는 영화 <공각기동대>가 그린 미래 같아 보였다. 1m가 훌쩍 넘는 증류기의 뚜껑을 열면 인조인간이 튀어나올 분위기다. 정 부사장이 다단식 증류기의 수도꼭지를 비틀어 술을 나눠준다. “사과로 만든 증류주 ‘추사 40’이다. 아직 다 여물지는 않았지만. 향과 맛을 보시라.” ‘볼빨간 사춘기’ 청년의 섣부른 자신감이 옅은 노란색 술에 스며있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뭔가 확 타올랐다가 금세 사라진다. “가당(설탕 등 당을 추가)을 하지 않은 ‘추사 40’은 완성되면 풍미가 그윽하다.” ‘추사 40’은 명작이다. 지난해 발표한 ‘2019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에서 증류주 대상을 탔다.

발효실엔 성인 두 명의 키를 합친 정도로 높은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가 7~8개 있었다. 정 부사장이 가만있질 않는다. 사다리에 올라가 뭘 퍼온다. 1ℓ짜리 플라스틱 비커엔 달콤한 봄 향이 났다. ‘추사 로제’다. 씁쓸한데 달다. 쓸쓸한 단맛에 반한다.

정제민 부사장이 오크통에서 ‘추사 40’을 뽑고 있다. 박미향 기자
정제민 부사장이 오크통에서 ‘추사 40’을 뽑고 있다. 박미향 기자

숙성실에선 시음회도 열린다. 박미향 기자
숙성실에선 시음회도 열린다. 박미향 기자

몇 잔 시음한 탓에 취기가 살짝 돈다. 한 점 시원한 바람이 그립다. 으슬으슬 한기가 도는 숙성 창고의 냉기가 바람이 돼줬다. 창고 실내 온도는 15℃. 오크통 50여개가 눈에 띈다. 오크통은 건조한 오크(참나무)의 내부를 태우는 정도에 따라 종류는 나뉘는데, 이곳의 오크통은 ‘헤비 토스팅’한 증류주용이다. 그가 통 하나의 뚜껑을 열어 ‘추사 40’을 컵에 따른다. “예산 하늘에 술 취한 천사가 많다.” 모두 웃는다. ‘엔젤스 셰어’(천사의 몫)를 얘기하는 거다. 위스키 등은 오크통에서 숙성하면 1년간 대략 2% 술이 증발하는데, 그걸 천사가 가져가 마신다는 낭만적인 얘기다. 웃음꽃이 피는 와중에 폭 1m, 길이 10m 통나무 식탁에 술상이 차려졌다. 치즈와 3가지 술이 올랐다. 40여분 걸린 투어 내내 웃음이 번졌다. 정 부사장이 추구하는 ‘와인 여행’의 마지막 장이 마침표를 찍었다.

“조선 시대엔 주막이 있었다. 지역에서 생산하는 쌀과 과일로 술 빚어 판 주막엔 사람들이 모였다. 그게 와이너리다. 주막 같은 와이너리가 자리 잡으면 농업문제 해결될 거다. 행복해지려고 먹는 시대엔 여행이 목적인 와이너리가 필요하다.”

투어 프로그램은 1인당 5000원, 사과 따기 체험 등은 1만원(5개) 정도의 비용이 든다. 375㎖ 한 병당 2만원이다.

농업회사법인 예산사과와인의 숙성 창고. 박미향 기자
농업회사법인 예산사과와인의 숙성 창고. 박미향 기자

■ 사과로 만든 와인? 맛있나요?

사과로 어떻게 와인을 만들까? 와인은 포도로 만드는 술이 아니었던가. “사과 대체 과일 수입이 느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사과 소비가 꾸준히 줄었다.” 정 부사장이 사과와인을 만들 게 된 현실적인 이유다. 요즘 서서히 외식업계에서 회자되는 스페인 사과 발효주 시드라 같은 술을 우리라고 못 만들까 하는 생각도 그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국내 생산 포도로는 쉽지 않았다. 대부분 식용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등 와인 주생산국은 양조용 포도로 술을 만든다. 그때 은성농원이 보였다. 40년 넘게 정성을 다해 땅을 일군 장인 서정학(76)씨의 숨결이 밴 사과밭이다. 장인을 설득해서 2010년께 ‘추사 애플 와인’을 출시했다. 이후 세상에 나온 ‘추사 로제’는 은성농원에서 재배하는 사과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 아니다. “품종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생각에 그가 한 도전이다. 스웨덴 품종 ‘레드 러브’가 재료다. 반을 쪼개면 안이 빨갛다.

농업회사법인 예산사과와인에서 생산하는 와인. 박미향 기자
농업회사법인 예산사과와인에서 생산하는 와인. 박미향 기자

“우리 제조법은 언 포도를 착즙해 쓰는 캐나다 아이스와인과 비슷하다. 자연적으로 언 것이나 인위적인 방법으로 얼린 포도를 사용하는 것을 ‘아이스와인 스타일’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에다 가당을 한다.” 사과즙에 가당을 해 30브릭스(당도) 정도로 맞춘 다음 한 달간 저온 발효한다. 알코올 도수가 12도 정도가 되면 발효를 정지시킨다. 12브릭스 정도 남기고 1년간 숙성 과정을 거치면 술이 완성된다. “올해는 뉴질랜드 품종 엔비(ENBY)로도 도전해볼 생각”이라고 말한다. 술 이름마다 ‘추사’가 들어가는 이유는 예산이 추사 김정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예산(충남)/글·사진박미향 기자 mh@hani.co.kr

정제민 부사장. 박미향 기자
정제민 부사장. 박미향 기자

[ESC] 정제민, 그는 누구?

설계한 대로 인생이 풀리는 이가 있다. 인생이 풀리는 대로 설계하는 사람도 있다. 농업회사법인 예산사과와인 정제민 부사장은 후자다. 전남 신안이 고향인 그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젊은 날 뜻하지 않은 일로 세계적인 아이스와인 생산국인 캐나다에 가 살게 됐다. 12년간이었다. 거기서 와인에 빠졌다. “한번은 캐나다인 지인이 자신의 지하실로 데려가 본인이 만든 와인을 보여줬는데 감동이 왔다.” 우린 일제강점기 때 가양주 문화가 말살되다시피 했는데, 금주법을 실시했던 미국조차 가양주 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만의 방식으로 양조하고 싶었다”는 그는 2002년께 귀국해 캐나다 이민이나 유학 관련 비즈니스를 하다가 2004년께 취미로 작은 공방을 열었다. 포털 다음에 동호회 ‘와인 만들기’도 만들었다. 당시 회원 수만 2만명이 넘었다. 양조 관련 유명한 동호회인 ‘맥만동’(맥주 만들기 동호회)의 아성을 넘보는 수준이었다. “‘포도 원정대’를 꾸려 영동, 고창 등 다니면서 여러 인연이 생겼다.” 와인은 독학했다. 양조전문가 김준철씨의 강의도 들었다. 한국 와인의 동반자 도란원의 안남락 대표, 여포 와인 여인성 대표 등도 ‘김준철 와인 스쿨’에서 공부했다. “한국 와인은 미래가 밝다. 왜냐면 땅을 일구고 열매를 따는 농민이 만드는 술이기 때문이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예산(충남)/글·사진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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