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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선택적 인사’에 안녕을 고함

등록 2019-06-12 19:57수정 2019-06-12 20:06

“선생님 안녕하세요, 친구들아 안녕.”

어린 시절 다른 사람과 관계 맺기의 첫 단계로 우리는 모두 인사를 배웁니다. 인사를 잘해야 예의 바른 사람이며, 좋은 첫인상을 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말과 함께요. 그래서일까 어느 조직에서든 인사를 강조합니다. 더러는 집착에 가까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학창시절 선배들에게 인사를 안 했다는 이유로 욕을 먹거나, 군 시절 경례할 대상을 헷갈려 혼이 나기도 했었습니다. 신입사원 때는 상사에게 문자를 보낼 때도 정중히 인사할 것을 교육받았습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후배이자 하급자인 저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선배면서 상급자인 상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인사는 곧 나와 상대의 위계를 확인하는 절차였던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상대가 나보다 높은지 낮은지 확인할 수 없고, 따라서 인사를 하지 않아도 해를 입지 않는 상황에서는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엘리베이터에서 사람과 마주쳤을 때가 있겠지요.

저는 같은 아파트에 5년째 살고 있습니다. 마침 꼭대기 층에 사는 바람에 엘리베이터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얼굴 대부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사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앞서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매일 마주쳐 아는 사람이지만, 굳이 내가 먼저 인사를 할 필요가 없다 여겼습니다.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내게 인사를 안 하고 있었으니까요. 우리는 5년째 같은 공간에 층만 달리하여 살고 있으나, 여전히 완벽한 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곳을 떠나게 될 날까지 그 사실이 변하지 않을 것이란 걸 저도 그들도 알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느 날, 9층에 사는 학생이 제게 인사했습니다. 종종 자전거를 끌고 오가는 중학생이었습니다. 처음이었습니다. 그간 수많은 사람과 엘리베이터를 탔으나, 다들 유령처럼 말없이 들어와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듯 서 있다가 자신이 내려야 할 층에서 스르르 내릴 뿐. 아무도 먼저 인사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도 따라 인사를 했습니다. 학생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자신이 내려야 할 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자 다시금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하며 내렸습니다. 다시금 앵무새처럼 따라 인사를 했지만, 닫히는 문 사이로 제 목소리가 들렸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같이 인사를 해주는 경우도 있었으나, 별다른 대꾸를 하지 사람도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며 아는 사람인가 쳐다보거나,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혼잣말처럼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공통적으로 다들 어색해했습니다. 저 역시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인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애당초 인사를 받고 싶던 것이 아닙니다. 상대에 따라 인사를 취사선택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웠을 뿐입니다.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별다른 변화는 없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어색하게 인사하거나, 무시합니다. 어쩌면 저는 그들에게 ‘마주치면 인사하는 이상한 아저씨’로 여겨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제가 타지 않길 바라는 사람도 한두명쯤은 있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기대하지 않았으니 실망하지 않습니다. 물론 인사를 잘 받아주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중 제일은 어머니뻘의 청소부 아주머닙니다. 대걸레와 물통을 든 채 엘리베이터를 타는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네면, 활짝 웃으며 반갑게 받아주는 것은 물론 그간의 안부를 묻거나 농담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좋은 점이 있느냐 물으신다면, 글쎄요. 더는 부끄럽지 않다는 것 정도밖에는 찾지 못하겠네요. 어쨌든 한명이라도 웃으며 인사를 해주게 되었으니 그걸로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글·그림 김보통(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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