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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걸쭉한 소스의 배신

등록 2019-04-24 21:06수정 2019-04-24 21:18

김태권의 고기고기 여행
김태권 그림.
김태권 그림.
“요즘 세상은 엉망진창이란 말일세. 그리고 말만 지나치게 번드레하지. 번드레한 말이 엉망진창을 감추는 데 도움이 되거든. 위에 끼얹은 진한 소스가 질 나쁜 생선살을 감춰 주는 것처럼 말일세. 진짜 좋은 넙치 살코기가 나온다면 난 성가신 소스 같은 건 끼얹지 않겠지.”

명탐정 에르퀼 푸아로가 식당에서 투덜댑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소설 <검은 딸기로 만든 ‘스물네 마리 검은 새’>의 들머리 장면. ‘검은 딸기’(블랙베리)도 ‘스물네 마리 검은 새’(파이)도 생소하지만, 소스에 대한 불평은 공감이 가요.

소스가 의심받는 이유는? 강렬한 맛과 향 때문입니다. 고기건 생선이건 질펀하게 소스 범벅을 해놓으면 원재료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거든요. 맛없는 식당에 몇 번 속아본 사람이라면 흥건한 소스를 보자마자 긴장을 하게 마련이죠.

그러나 소스는 결백합니다. 톰 닐론의 책 <전쟁과 음식>에 나온 대로, 한때 ‘(소스의) 걸쭉함은 부와 편안함의 대명사’였고 ‘풍부한 갈색 풍미는 벽난로 옆에서 먹는 배부른 저녁 식사를 상징’할 정도였죠. 에르퀼 푸아로처럼 대단한 탐정은 아니지만, 소스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볼까요.

걸쭉한 소스를 만들려면 원래는 시간과 비용을 많이 들여야 합니다. <더 푸드 랩: 더 나은 요리를 위한 주방 과학의 모든 것!>에서 요리사 켄지 로페즈 알트는 ‘얼마나 시간이 걸려야 걸쭉한 닭 육수가 우러나는지’ 실험을 합니다. 뼈와 살이 붙은 결합조직과 닭 껍질의 콜라겐이 젤라틴으로 바뀌려면 오랜 시간 가열해야 해요. ‘콜라겐은 꼬아놓은 실처럼 보인다. 실을 이루고 있는 가닥을 분리해 보려고 해보았는가? 가능은 하지만, 시간이 걸린다. 똑같은 일이 냄비 속의 결합조직이 끓을 때 일어난다.’ 실험을 해보니 걸쭉한 닭 육수를 만들려면 4시간을 끓여야 한대요. 육수를 졸여 소스를 만드는 일에는 더 많은 시간이 들고요. 비용이 많이 들지요.

그래서 트릭을 씁니다. 전분을 넣는 것은 전통적인 방법. 오늘날에는 ‘크산탄 고무’(Xanthan Gum) , ‘구아르 고무’(Guar Gum) 따위를 사용한대요. 오래오래 고깃국물을 졸여 만든 소스의 진짜 걸쭉함과는 다르죠. 그러나 사람들이 헛갈려준 덕분에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가 되었습니다. 톰 닐론의 주장처럼 ‘이런 고무와 점성을 높이는 재료가 자본주의의 행진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것은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일이죠.

소스를 이용해 재료의 상태를 속이는 것도 마찬가지. ① 소스는 원래 맛있는 고기를 더욱 맛있게 만들기 위한 것이죠. ② 엠에스지(MSG)도 ③ 다진 고기를 이용한 햄버거 조리법도 마찬가지. 그런데 세 가지 모두 묵은 고기를 신선한 것처럼 속일 목적에 이용당했어요. 진범은 따로 있습니다. 이문을 더 많이 남기기 위해 싸구려 재료를 사용하겠다는 욕심이 진짜 범인. “모든 것이 잘 들어맞았어. 완벽한 알리바이였지. 소스가 듬뿍 뿌려져 있었던 걸세! 생선살이 전혀 보이지 않도록 말일세!” 사건을 해결한 에르퀼 푸아로는 소설 끝에서 이렇게 외치죠.

이 욕심은 때때로 우리를 위험으로 내몰기도 합니다. ‘스물네 마리 검은 새’ 파이는 원래 영국의 전래동요 가사죠. “스물네 마리 검은지빠귀를 파이에 넣어 구웠네.” 그런데 옛날 판본에는 이렇게 되어 있대요. “스물네 명의 소년을 파이에 넣어 구웠네.” 섬뜩하지요. 이문을 남기려던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어리고 젊은 사람이 상하는 사건을 보며 마음이 안 좋습니다.

김태권(먹기 좋아하는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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