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에서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은 정체성이 뚜렷하다. 옷을 갈아입어도 고유한 정체성은 옅어지지 않는다. 올해로 데뷔 33주년을 맞은 김완선(50)이 그런 이다. 1986년 ‘오늘밤’으로 데뷔한 그녀는 ‘리듬 속의 그 춤을’,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가장무도회’ 등 각종 히트곡을 내며 1980~90년대 ‘김완선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브레이크댄스, 로봇 춤 등 당시 파격적인 행보로 가요계를 단박에 사로잡은 그는 데뷔한 해 각종 신인상을 휩쓸었다.
한동안 한국을 떠나 있기도 했지만, 최근엔 예능 프로그램 <불타는 청춘>, <내 손안에 조카티비> 등에서 특유의 카리스마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변신’은 그의 키워드. 한국 댄스뮤직의 포문을 연 그가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3월 초 1인 기획사 ‘케이더블유선플라워’(KWSunflower)를 설립한 것이다. 그를 지난 11일 김성일 스타일리스트가 만났다.
정리 김서이(칼럼니스트),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김완선은 밤 8시 이후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건강관리법이다.
김성일 (이하 김) 저와 동갑이잖아요.(웃음)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2012년 한 합동 콘서트 잡지 화보를 찍으면서 처음 일했죠. 정말 스타일리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옷을 권해도 그 옷과 자신을 동화시키려 노력하는 모습이 돋보였어요. 데뷔했을 때가 만으로 열일곱살, 10대가 섹시한 이미지의 댄스 가수로 나타난 이는 완선씨가 처음이었죠. 아이돌의 원조네요.
김완선(이하 완) 그때 가수들 대부분은 스무살이 넘어 대학가요제 같은 관문을 통과해 데뷔했죠. 저도 사람들이 20살이 넘은 걸로 봤어요.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 아티스트 같은 직업이 없었던 시절이에요. 화장도, 헤어도 제가 다 했죠.
김 외모가 예전과 다름이 없어요. 어떤 노력을 하나요?
완 생활습관을 지금까지 유지하는 게 주효했던 것 같아요. 예전엔 새벽에 일어나 인터뷰하고 오후엔 방송 스케줄, 밤에는 행사를 뛰었죠. 배가 고파도 밤엔 무대에 서야 해서 밥을 먹을 수 없었어요. 밥 먹고 뛰면서 노래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요. 끝나도 야식을 안 먹어요. 그 습관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아요.
김 데뷔했을 때 사람들이 놀랐어요. 굉장히 파격적인 의상이었잖아요.
완 지금은 앨범 나올 때마다 콘셉트를 잡지만, 30년 전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어요. 이번 ‘토토즐’(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방송은 이렇게 한 번 해볼까, ‘가요톱10’은 이렇게 해볼까 고민하며 노력했어요.
김 당시 김완선씨 노래는 눈감고 들어도 ‘김완선이구나’ 하고 목소리를 알아봤어요.
완 당시 가수들은 음악, 의상, 메이크업 등 모든 걸 직접 준비했어요. 자기 색깔이 나올 수밖에 없죠. 레슨을 받은 후 가수가 된 이도 거의 없어요. 저도 레슨 받진 않았어요. 대신 악기, 작곡, 한국무용, 발레 등을 배웠죠. 저만의 창법과 목소리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죠. 6집 앨범부터 곡을 만들기 시작했죠.
김 5집 앨범은 100만장 팔렸어요. 여가수 최초 단일 앨범 최고 판매 기록이더군요. 전앨범에도 수많은 히트곡이 있는데 정작 ‘가요톱10’ 등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처음 1위 한 노래는 5집에 수록된 곡이었잖아요.
완 당시엔 댄스 가수란 개념이 없었고, 비디오형 가수라고 불렀어요. 기존에 존재했던 가수의 전형적인 틀을 깬 셈이죠. 방송국 체면상 1위를 주기엔 너무 가벼운 느낌이라고 여겼던 것 같아요.
김완선은 5집에 수록된 ‘나만의 것’으로 <엠비시>(MBC)의 ‘여러분의 인기가요’, <한국방송>(KBS)의 ‘가요톱10’ 1위에 올랐다. ‘나만의 것’은 현란한 춤사위도 없는 발라드풍의 노래다. 누구도 따라오기 어려운 무대 매너는 때로 독이 되기도 했다. ‘한국의 마돈나’란 평은 들었지만, 가창력은 오히려 평가 절하됐다. 하지만 이 곡으로 노래 실력도 갖춘 가수로 인정받았다.
김 늘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 같아요. 싱글앨범 ‘강아지’도 인상적이었어요.
완 음악 전반을 좋아해요. 그래서 싱글앨범을 낼 때마다 장르가 바뀌는 겁니다. 음악이라는 큰 틀 안에서 여행하는 거죠.
김 이모가 가요계에서 유명한 한백희(1949~2006) 여사죠? 희자매, 인순이 등을 성공시킨 매니지먼트 대모셨죠. 1992년 돌연 가요계 은퇴 선언한 게 이모와 관련 있다는 보도도 있었는데요.
완 어렸을 때 이모한테 반했었죠. 훌륭한 프로듀서이자, 제작자,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아티스트였고, 제 친구이자 부모님이셨어요. 방송국 피디들은 농담처럼 ‘독립하면 못 살 줄 알았다’ 했죠. 전 정신력이 강해요. 이모가 그렇게 길렀어요.
김완선은 1998년 10년 넘게 동고동락한 이모와 결별한다. 한동안 홍콩, 대만 등에서 활동해 ‘원조 한류는 김완선’이라는 소리도 나중에 들었다. 2006년 이모가 고인이 된 후, 그는 인생에서 쉽지 않은 선택을 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대학교에서 디지털아트를 전공했다. 당시 그의 나이 37살, 마흔을 목전에 둔 때였다. 그는 “뭐든 20년 정도 늦게 배운다”면서 “사람은 다 자기만의 때가 있다”고 말했다.
김 외국 진출을 했었죠?
완 너무 앞서갔어요. 1988년도에 일본 진출했을 땐 차별이 심했어요. 그래서 금세 돌아왔어요. 대만에선 반응이 좋았어요. 재계약을 하자고 했는데 당시 이모와의 갈등이 최고조였어요. 제가 안 하겠다고 하고 국내 컴백을 했어요.
김 다시 돌아가서, 15~16살 쯤 데뷔 전에 반항심은 없었나요?
완 제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기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춤추고, 끝나면 작곡 숙제를 했는데, 정말 좋았어요. 무대에서 할 동작과 노래를 상상만 해도 신났어요.
김 요즘 우리나라는 가요계가 너무 음원 위주죠. 음반 안 내는 경우도 많고요. 아쉽죠.
완 우리는 미국 등에 견줘 인구가 적은 편이죠. 마니아는 있지만, 그 수는 상대적으로 적어요. 그러다 보니 쏠림현상이 심해요. 유행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이 뒤떨어진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 같아요. 대중이 좋아하는 것을 자신도 좋아하려고 노력하죠. 노력하는 것과 진짜 좋아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예요. 자기의 취향이나 개성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김 우리나라 시장이 작은 거죠.
완 외국에서는 갓 데뷔한 신인가수부터 스티비 원더나 돌리 파튼 같은 원로까지 공존하잖아요. 시장이 커서죠. 우리 세대 가수 중 지금 활동하는 이는 거의 없어요. 무대가 없는 거예요.
김성일(사진 왼쪽) 스타일리스트와 대화하고 있는 김완선.
김 10대부터 50대까지의 ‘김완선’을 각각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완 10대 때는 불도저 같았죠. 앞만 보고 직진했어요. 20대는 음울했죠. 일에 관한 고민도 많았고, 이모와의 갈등도 컸어요. 30대는 생각을 다 내려놨던 시기였어요. 40대는 음악 여행을 시작했죠. 그리고 50대가 됐어요. 이제는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에요.
5월이면 그의 신곡이 세상에 나온다. “밝고 행복한 노래”가 될 것이라는 말하는 김완선. 데뷔 초반 대중을 사로잡은 댄스뮤직과 비슷한 곡이라고 한다. 그의 나이 쉰. 어디에도 늙음의 추레함은 없다. 반짝이는 젊음이 그의 얼굴에서 빛난다.
스타일리스트
김완선 프로필
1986 1집 <오늘밤>으로 가요계 데뷔. 일간스포츠 제1회 골든디스크 신인가수상, <한국방송>(KBS) 방송가요대상 신인가수상 수상.
1987 2집 <나홀로 뜰 앞에서> 발매, <한국방송>(KBS) 가요대상 가수상 수상.
1988 3집 <나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 발매. <문화방송>(MBC) 10대가수상, <한국방송>(KBS) 가요대상 가수상 수상.
1990 5집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발매. 100만장 판매 돌파. <한국방송>(KBS) 가요대상 가수상, 골든 디스크상 본상 수상.
1991 <문화방송>(MBC) 10대 가수가요제 가수상, <한국방송>(KBS) 가요대상 가수상 수상
1994~1996 <더 퍼스트 터치> 등 대만에서 발매.
1997 <차이니스 타이베이 스페셜 에디션 베스트> 중국에서 발매.
2005 9집 <리턴> 발매.
2012 뮤지컬 <뉴 롤리폴리> 출연
2015 <에스비에스>(SBS) 연예대상 버라이어티부문 신인상 수상.
2017 10집 <디 오리지널> 발매. 영화 <오즈 온 더 문>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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