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제가 잘난 척하다가 딱 걸린 이야기입니다. 초밥집에서 맑은 국물이 나오자 일행이 “무슨 생선이냐”고 제게 물었죠. 나는 대답했어요. “내가 거기까지는 몰라요. 국물만 먹고 흰살생선 종류를 구별할 실력은 아직 안 됩니다.” 듣고 있던 초밥집 사장님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평생 이 일을 한 나도 그건 안 됩니다.”
잘난 척하기의 하수는 모르는 것도 안다고 합니다. 남들이 다 아는 척할 때 “나는 거기까지는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한 수 위죠. 첫째로 들통 날 염려가 없고, 둘째로 남들하고 달라 튀어 보이며, 셋째로 마치 그것만 빼고 다 아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장님은 정말 전문가니까 그런 내가 한심해 보였던 게죠.
‘맛을 안다’는 말은 ‘취향이 있다’는 뜻. 미식은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주제죠.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요.
① 미식 비판 - 미식을 고깝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맛의 차이도 별로 없는데 비싼 값을 치르다니, 결국 돈 많이 쓴다고 자랑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 프랜차이즈 음식점에서 고기 구워 먹고 캔 커피를 뽑아 마시는 것이나 비싼 스테이크나 화로구이를 먹고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주장. 정말 그럴까요?
② 비판에 대한 반론 ? 미식을 옹호하는 반론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 보기에 차이가 별로 없어 보일지 몰라도, 취향에 목숨 거는 사람들에게는 그 차이가 크다는 것. 예를 들어 젓가락으로 만두피부터 쿡쿡 찌르는 사람에게는 소롱포와 고기만두의 차이가 없겠지만, 소롱포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입천장을 델만큼 뜨거운 즙이 중요하지요.
③ 반론에 대한 재반박 ? 둘 다 그럴싸해요. 그래서 드는 세 번째 생각. 미묘한 차이가 정말 있긴 있는데, 그 차이를 알아차리는 능력 자체가 엄청난 잘난 척의 결과라는 것. 인간이란 과시하기 좋아하는 존재. 과시적 행위 중 으뜸은 번거롭고 쓸모없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죠. 그래야 자기가 생존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유한계급’임을 과시할 수 있으니.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의 ‘과시적 소비’ 이론은 유명하죠. 미묘한 맛의 차이를 아는 능력은 생존에 쓸모없는 능력이고 또 그 능력을 쌓기 위해 돈과 시간이 엄청나게 들어간다는 점에서, 미식은 궁극의 잘난 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④ 재반박을 피하는 궁극의 전략 ? 그렇다고 ‘미식이 졸부의 전유물’이라면 미식가들은 억울하겠죠. ‘돈 많은 속물’로 보이지 않기 위한 전략도 있어요. 비싼 음식 대신 가성비 맛집을 찾는 겁니다. 길거리 음식이면 더욱더 좋죠.
<세설신어>는 옛날 중국의 귀족들이 잘난 척한 일화를 모아놓은 책. 왕제라는 부자가 임금님을 초대해 돼지고기를 대접했어요. “고기가 어찌 이리 연한고?” “사람의 젖을 먹여 키운 돼지입니다.” 임금은 감탄은커녕 불쾌했어요. 왕제는 하수였지요.
진짜 고수와 대화를 한 적이 있어요. 어느 날 비싼 고기 요리를 먹다가 화제에 오른 것이 떡볶이. “떡볶이는 맛이 없다”고 하면 하수. “서울의 ‘오시오 떡볶이’와 신제주의 제원 분식 떡볶이를 가보았다”고 말한 나는 중수. “경기도 ○○시장 귀퉁이에 있는 간판도 없는 떡볶이집이 맛있어서 한 시간씩 차를 몰고 그곳을 간다”고 말한 친구가 고수. 시장 이름이 뭐냐고요? 나도 들었는데 그만 잊었어요. 고수가 되기는 그른 걸까요.
김태권(먹기 좋아하는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