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에서 힘차고 즐겁게 뛰어 축구하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쏟아지는 땀을 윗옷을 끌어올려 닦고, 차오르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무릎을 잡는다. 상상 속 운동장에는 한 무리의 남성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여성인 나는? 정작 내 자리는 상상하지 못한다. 그 자리를 주장한다. 여성이 운동 그리고 운동장에 하나의 주체로 오롯이 서있길 바란다. 지난 10월10일부터 서울 종로구 팩토리그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운동-부족>의 외침이다.
전시장의 작품들은 왁자지껄하다. 조용히 작품만 보다 나갈 수 없는 전시다. 개성 넘치는 스포츠용품 판매 편집 숍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 허리를 뒤로 젖혀 유연성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림보, 주먹으로 한껏 쳐볼 수 있는 샌드백, 농구공과 농구대, 알록달록한 스케이트 보드가 전시장을 채우고 있다. 기지개를 켜 몸을 좀 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 전시의 기획팀인 팩토리 콜렉티브의 구성원 중 한 명인 여혜진씨는 “운동장을 누군가 빼앗은 건 없지만 여성들은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고 사회화하는 중에 젠더 규범의 영향을 받아 온전히 운동장을 누비고, 갖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 그런 경험에서 벗어나 여성의 운동을 주목해 보길 바랐다. 공간 구성도 실제로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고 말한다.
<운동-부족> 전시에는 여성의 몸, 움직임, 운동과 관련한 다양한 활동을 펼쳐온 팀 또는 개인들이 참여했다. 대전광역시 기반의 여성주의 잡지 <보슈>팀, ‘여성이 주체가 되어 다양한 운동을 가르치고 배우며 경험을 공유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비정기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는 ‘여가여배(여자가 가르치고 여자가 배운다)’팀, 다양한 몸의 여성이 뛰는 이미지를 벽화로 선보인 윤예지 일러스트레이터, 국내의 여성·성소수자 스케이트보드를 취재해 온 정아람 문화기획자가 그 주인공이다.
자신의 몸에 집중하며 농구, 야구, 킥복싱을 하는 사람이 그려진 포스터. 이 작품은 강소희 기획자와 이아리 디자이너로 구성된 여가여배팀이 선보인 ‘젠더-스위치 포스터’다. 당연히 남성이 있을 것이라 여기는 자리에 웃지 않고 몸에 집중해 운동하는 강한 여자를 그려 넣었다. 여가여배팀은 “어떤 스포츠종목을 떠올릴 때 ‘남자선수’로 자동 연상되는 부분이 있다. 유난히 한 무리의 남성이나 강한 육체의 남성이 연상되는 종목의 주체를 여성으로 바꿔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보슈>팀은 올해 초부터 꾸려 운영하고 있는 ‘축구클럽(FC) 우먼스플레잉’의 경험을 전시한다. 전시장 어디에선가는 운동을 하다 내뱉는 거친 숨소리가 울린다. 오래 운동장을 굴렀을 법한 축구화와 다 헤진 축구공 옆에서 나는 소리다. <보슈> 서한나 편집장은 “여성들이 운동하면서 내는 숨소리와 사용감이 있는 축구화를 보면서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면서 팀 플레이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여성의 운동’이라는 주제는 여성운동, 페미니즘운동의 맥락과 따로 놓을 수 없다. 여가여배는 “여성의 운동은 여성의 몸을 사람의 몸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 사회에서 사람이란 남자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여성의 운동은 그런 의미에서 여성의 몸이 남자와 똑같이 기능하기 위해 쓰이고, 똑같이 운동장을 필요로 하며, 똑같이 즐거울 권리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선명하게 알려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여성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고 쓰고자 하는 욕구와 맞물려 지금 당장 절실한 것은 그 욕구를 발현할 수 있는 장, 환경이다. 서한나 편집장은 “페미니스트들끼리 모여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다. 이런 환경에서 여성들이 함께 모여 운동을 하다보면 내 곁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나를 응원하며 지지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을 피부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환경이 정말 중요하게 여겨졌다”고 말했다. 여가여배팀은 여성의 운동과 관련해 가장 절실한 것으로 ‘장’과 ‘경험’을 꼽는다. “운동을 시작하는 여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여성을 주변부가 아닌 동등한 주체로 인식하는 여성 동료다. 그리고 일상 운동 영역에서 여성 롤모델에 관한 콘텐츠가 다각적으로 노출돼야 한다”고 여가여배 쪽은 덧붙였다.
<운동-부족>의 현재를 ‘운동-충분’의 미래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전시와 함께 진행한다. 오는 금요일에는 전시 참가자들의 ‘토크 프로그램’이, 토요일에는 ‘넘어져도 괜찮은 스케이트보드 워크숍’이 열린다. 11월2일에는 인도의 여성 레슬링 선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당갈>을 함께 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전시는 오는 11월3일까지 계속된다.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