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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어쨌든 엉망이야

등록 2018-10-11 09:19수정 2018-10-11 09:22

‘엉망’ 전시장.  사진 이우성 제공
‘엉망’ 전시장. 사진 이우성 제공
광화문 근처를 지날 때마다 일민미술관 외벽에 걸린 ‘엉망’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차는 막히고 약속엔 늦었고, 밀린 일을 떠올리면 세상이 정말 엉망이었다. 작가 사사(Sasa[44])의 개인전 ‘엉망’이 시작됐다.

사사(Sasa[44])는 오래전부터 지켜보던 작가다. 대량 생산되고 대량 소비되는 물건들, 그 물건들 이면의 자본에 대한 담론들, 동시대를 이루는 보이지 않는 혹은 너무 잘 보여서 보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기억이나 경험을 다룬다. 아, 이 작가는 줄곧 엉망진창인 세상을 기록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이런 판단을 하지 않더라도 사사(Sasa[44])의 전시는 시각적으로 흥미롭다. 예를 들어 우유갑, 음료수 캔, 생수병 등을 전시장 한 곳에 가득 진열해 두었다. 모두 비어 있으니 재활용센터에 있어야 어울릴 것 같다. 그런데 화장품 매장에 진열된 새 상품들처럼 가지런하다. 잘 보이라고 조명도 걸어 두었다. 이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의미의 함정에 빠진다. ‘왜 그랬을까?’ ‘왜 여기 이런 걸 가져다 놓았을까?’ 의미가 없는 것들에게 의미가 생긴다. 그러나 그저 빈 깡통일 뿐이다. 엉망이야…라고 혼잣말하게 될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충분히 봤다고 할 수 있지만, 조금 더 들어가 보고 싶다면 우리가 매일 사고 버리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된다. 무엇인가를 버리면 그것은 우리에게서 사라진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쓰레기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더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뜬금없는 소린데, 작가 이름 사사(Sasa[44])가 늘 ‘죽다’라는 의미의 ‘사’로 읽혔는데, 이 작품을 보고 나서는 ‘사다’라는 의미의 ‘사사’로 읽힌다. 소비는 곧 죽음 혹은 소비가 축적되면 멸망이라는 인식으로 확장되는 것 같기도 하고.

‘만지면 죽인다’는 글자가 적힌 나무 가방 작품도 인상적이다. ‘다 내 거니까, 건들지 마’라고 소리 지르는 우리 형이 떠올랐다. 벽면에 커다랗게 ‘dont touch’라고 적어 둔 작품도 있다. 이 경계심 가득한 문장들을 적기 위해 밝고 명랑한 색들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다양하게 사용했다. 예쁘다. 그 앞에서 모네의 ‘수련’ 연작을 떠올렸다고 하면 우스꽝스럽게 보이려나.

어떤 변화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물론 미술 작품의 개념과 범위의 것이기도 할 테지만, 본질적으론 시대에 대한 것이다. 광화문에는 차도 사람도 너무 많고 모두 어딘가에 늦은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길을 잘못 든다. 엉망이지만 스스로 엉망이라고 부르는 순간 일상은 허물어진다. 정직한 작가라면 이 세계를 기록하는 자신의 방식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사사(Sasa[44])가 굳이 긁어모은 엉망의 풍경은 11월25일까지 전시된다.

이우성(시인·미남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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