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미제사건 노트
9년 만에 재수사 2009년 2월8일 오후 1시50분 무렵. 제주시 애월읍에 살던 강정덕씨(가명, 당시 67살)는 여느 날처럼 산책에 나섰다. 그가 택한 산책길은 평소에도 자주 다니던 고내오름이었다. 그런데 익숙한 도로를 걷던 그의 눈에 농업용 배수로 속에 있는 이상한 물체가 들어왔다. 처음엔 마네킹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은 왕복 2차선의 교통량 적은 도로인 데다 주변엔 오름과 밭이 대부분이다. 누군가 굳이 그곳까지 찾아와 마네킹을 버렸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강씨는 다른 마을 주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마침 그는 근처에서 20대 여성이 실종됐단 사실을 알고 있었고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 강씨가 발견한 것은 역시 8일 전 실종된 김윤영씨(가명, 당시 27살)의 시신이었다. 당시 어린이집 보육교사로 일하고 있던 윤영씨는 토요일이었던 1월31일 오후, 고등학교 친구들과 저녁 약속이 있다며 애월읍의 집을 나섰다. 제주시청 근처 대학로에서 만난 윤영씨와 친구들은 새벽 2시 무렵까지 함께 했다. 술을 마셨던 윤영씨는 근처에 자신의 차를 놓아둔 채 친구들과 택시에 올랐다. 그리고 제주지방법원 앞 도로에 혼자 내린 뒤, 다시 택시를 타고 제주시 용담동의 남자친구 집으로 향했다. 그때가 오전 2시50분 쯤. 그러나 윤영씨는 불과 10분 뒤인 새벽 3시에 남자친구 집에서 다시 나왔다. 남자친구의 흡연 문제로 다퉜기 때문이었다. 새벽 3시3분에 남자친구에게 ‘네가 정말 이럴 줄 몰랐다’는 문자 메시지를 남긴 윤영씨는 곧 애월 하귀 연합콜택시에 전화를 걸었지만 새벽 시간이라 택시는 배차되지 않았다. 그 뒤 한 시간이 흐른 새벽 4시4분 무렵 윤영씨의 휴대전화는 제주시 애월읍 광령초등학교 인근에서 꺼졌다. 2월1일 일요일 내내 윤영씨와 연락이 닿지 않고, 출근을 해야 하는 월요일 아침까지 나타나지 않자 가족들은 경찰에 신고했다. 같은 날 오후 8시20분, 제주시 옛 제주세무서 후문 무료주차장에서 윤영씨의 차량이 발견됐다. 그리고 실종 닷새째인 2월6일 오후 3시20분경에는 제주시 아라동의 한 사회복지관 옆 밭에서 윤영씨의 가방이 발견됐다. 가방에는 휴대전화와 주민등록증을 비롯한 소지품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시신이 발견된 건 그로부터 이틀이 더 흐른 2월8일이었다. 윤영씨는 실종 당일 입었던 밤색 무스탕 점퍼만 걸친 채 바닥을 향해 엎드린 모습으로 발견됐다. 부검 결과 사인은 전형적인 경부압박 질식사 즉 목이 졸려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특별한 외상이나 타박상은 발견되지 않았고, 손발에 묶인 흔적도 없었다. 경찰은 윤영씨가 실종 당일 새벽 남자친구의 집에서 나온 직후 납치돼 피살된 것으로 추정했다. 시신이 발견된 장소와 휴대전화 신호가 끊긴 지점, 가방이 발견된 지점 등을 종합해 범인이 제주시 용담동 주변에서 윤영씨를 살해한 뒤 애월읍 하가리에 시신을 유기한 것으로 봤고. 이후 광령초등학교 방향으로 이동해 휴대전화를 끄고, 30㎞ 거리의 제주시 아라동으로 다시 이동해 가방을 버리고 도주한 것으로 추정했다. 또 윤영씨의 시신에 외상이 없는 점으로 보아 저항 없이 차에 탔을 거라 봤다. 콜택시를 배차 받는 데 실패하고 지나는 택시를 탄 뒤 집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살해당한 것으로 짐작한 것이었다. 경찰은 즉시 제주도내 택시기사 5천명을 용의 선상에 올려 전수 조사에 나섰다. 또 택시업체 운행일지를 확인하고 예상 이동 경로 주변 폐쇄회로 티브이 26대를 시간대별로 분석해 범행 당일 행적이 의심되는 인물 10여명을 추려냈다. 프로파일러 8인 분석
개·돼지 사체 실험까지 그 과정에서 경찰은 그중 한 명인 ㅂ씨에 주목했다. 윤영씨가 실종된 2009년 2월1일 새벽 범행 현장 부근인 애월농협 유통센터 앞 폐쇄회로 티브이와 애월읍의 한 펜션 앞 폐쇄회로 티브이에 그의 택시와 유사한 차량이 촬영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여러 차례 그날 자신의 행적에 대해 진술을 번복했고,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서 ‘거짓 반응’까지 나왔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 뜻밖의 혼선이 생겼다. 바로 부검의가 제시한 살해 시점이었다. 부검의는 시신의 건조와 부패 상태, 체온, 사체의 피부 반점 그리고 위 속에 음식물이 남아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시신이 사망한 지 일주일이나 지났다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부검의는 윤영씨가 바로 사망한 게 아니라 발견 시점에서 24시간 이내 즉 2월7일 경에 숨졌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하지만 경찰의 의견은 달랐다. 당시의 쌀쌀한 기온과 시신 유기 장소가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 그늘이어서 부패를 지연시켰을 거라는 것이었다. 특히 윤영씨의 위에서 발견된 음식물은 육류와 고춧가루 등으로 실종 전날 친구들과 함께 먹었던 삼겹살과 꼬치, 어묵 등과 일치한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이 사건에서 사망 시점은 무척 중요하다. 범행 시점이 달라지면 수사 대상과 범위도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경찰은 실종 당일 윤영씨가 숨졌을 것으로 보고 수사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부검의의 소견대로 시신 발견 시점으로부터 24시간 이내인 2월7일 숨졌다면 경찰이 그간 수집한 모든 정황 증거들이 무의미해진다. 특히 경찰이 주요 피의자로 봤던 택시기사 ㅂ씨는 2월7일엔 확실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결정적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 이 사건의 수사본부는 2012년 6월5일, 3년 4개월 만에 해체됐다. 이 사건을 재수사하기 시작한 건 2016년 2월7일 제주지방경찰청 중요미제사건 전담수사팀이 신설되면서부터였다. 제주지방경찰청은 2017년부터 2018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전국 경찰 프로파일러 8인과 합동 분석을 실시하고, 우리나라 법의학 사상 최초로 법의학자 이정빈 교수팀에 의뢰, 2018년 1월 말부터 3월 초에 걸쳐 사망 시점 추정을 위한 동물실험을 실시했다. 개 사체 3구와 돼지 사체 4구를 이용해 5차례에 걸쳐 사체 부패를 재현한 이 실험에서 실종 당일 윤영씨가 피살됐다는 경찰의 주장은 법의학적으로 입증됐다. 또 경찰은 미세증거 증폭기술을 통해 시신에서 발견된 실오라기의 형태와 재질을 정밀 분석했고 그것이 택시기사 ㅂ씨가 당일 입었던 옷과 유사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법원은 둘 다 정황 증거일 뿐 직접 증거로 볼 수 없다고 판단, ㅂ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제주지방경찰청 중요미제사건 전담수사팀은 구속영장 기각 이후 수십 권에 달하는 기존 증거자료를 세세히 재검토하고, 국과수는 물론 사설 전문연구기관에 의뢰해 물증 감식만 50여 차례 진행했다. 그 결과 영장 신청 전에는 피해자 시신에서 피의자 ㅂ씨의 청색 남방으로 추정되는 미세섬유만 확보했지만, 다른 옷의 미세섬유도 확보했다. 또 ㅂ씨의 택시에서 피해자가 입었던 무스탕 코트 외에 다른 옷의 미세섬유도 확보했다. 물론 이것들 역시 직접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미세섬유가 서로의 옷에 묻으려면 웬만한 접촉 없이는 불가능하며, 발견된 옷가지 수가 늘어난 만큼 ㅂ씨와 피해자가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유력 용의자 체포
구속영장 기각 또 경찰은 이전까지 피의자 ㅂ씨의 차량 동선을 중심으로 수사했지만, 영장 기각 후엔 예상 경로로 이동한 모든 차량을 대상으로 재조사해 ㅂ씨의 택시가 유력용의 차량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그뿐만 아니라 사건 당시 “ㅂ씨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했다”는 지인들의 진술을 다수 확보했고, 9년 전 거짓말탐지기 기록과 최근 체포 당시 대면조사 기록을 전국 경찰 프로파일러 8명에게 분석하게 해, ‘ㅂ씨가 유력한 용의자’라는 내용의 분석보고서를 받았다. 물론 새로 수집한 증거들 역시 직접 증거가 아닌 정황 증거일 뿐이라 구속영장 발부 여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경찰 입장 또한 신중하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유족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경찰 입장에선 끝없이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 9년 전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면 범인의 자백이나 결정적 물증이 없는 한, 과학 수사만이 답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몇 개월 뒤면 윤영씨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된다. 살아있었다면 서른일곱이 될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을 이 의미 없는 셈을 윤영씨 부모님은 해마다 하면서 살아왔다. 이 셈을 끝낼 수 있게 해드려야 한다. 또 미제사건 범인이 검거되는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반드시 잡힌다는 메시지를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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