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의뢰가 들어왔다. 주제도 정해져 있다. 그런데 며칠간 고민했다. 주제가 정해지면 번개처럼 쓰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그게 잘 안됐다. 진짜 어른이 되는 법을 써 달라고 하는데 뭐 이런 주제가 다 있나.
사건의 발단은 9월4일 출간된 내 책 <어른은 어떻게 돼?> 때문이다. 평소 하던 대로 소셜미디어 페이스북을 통해 책 선전도 하고 페이스북 친구들과 즐겁게 놀았을 뿐인데, 정식으로 출간되자마자 출판사로부터 2쇄를 찍는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어 있었다. 셀 수 없는 다양한 서평과 책 구매를 했다는 간증… 아니 인증샷이 올라왔다. 일본인 아내와 만나 네 명의 아이들을 낳고 키운 12년간의 시간과 공간을 기록한 에세이일 뿐인데 왜 이렇게 됐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른이 되는 법을 써달라고 한다. 이건 다 출판사 때문이다. 왜 제목을 그렇게 지어서 이런 시련을 주는가.
나는 사실 본업이 노가다다. 그전에는 조그마한 10평짜리 술집 주인을 했다. 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저널리스트도 했다. 그전에는, 직업 없이 떠돌아다니는 인생을 보냈다. 처음부터 도망치듯 도쿄에 왔다. 오자마자 동양 최대의 유흥가라 불리던 신주쿠 가부키초 생활부터 했다.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는데 내세울 만한 직업이 없다. 그나마 저널리스트가 있긴 하지만, 그걸 쓴다고 ‘나는 진짜 어른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보통 또래보다는 많을 것으로 생각되는 네 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기는 한다. 그러면 난 어른인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미 백여 개는 넘긴 듯한 서평, 독후 감상들을 읽어보면 어느새 시대의 현자가 되어 있다. 나와 와이프는 훌륭한 부모의 초상이고,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개성 넘치고 독립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책은 그냥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렇게 3일을 고민했다. 나는 진짜 어른인가 아닌가? 결론은 역시 모르겠다. 다만 최선을 다한 것 같다. 일본어가 안 통할 때부터 했던 밤거리 호객꾼 생활도 그랬던 것 같고, 술집을 할 때는 손님들이 주는 술이란 술은 무조건 마시면서 그들의 기분을 맞췄다. 박봉을 받았던 저널리스트 시절에도 이런저런 특종을 잡거나 잠입취재를 하거나 그랬던 것 같다. 노가다를 하는 지금은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집에 들어가는 생활을 1년여 동안 주6일 페이스로 하고 있다. 그 와중에 신문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쓰고 때때로 주간지에 글도 쓰고, 번역 일도 한다. 거절하고 싶은데 거절을 못 한다. 주어진 의뢰는 그게 공사든 글쓰기든 아무튼 하고 본다. 그렇게 최선을 다한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3일 고민해도 안 나오면 안 쓰면 되는데 이렇게 꾸역꾸역 채워 나간다. 아이들과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게 맞으면 최선을 다해 인정한다. 공부하기 싫다고 하면 하긴 나도 공부 안 했지, 하기 싫었지라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하지 마, 그냥 놀아. 대신 신나게(최선을 다해) 놀아라” 라고 말한다. 말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우리 아이들은 그러고 있다.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다. 환경도 좋다. 이웃 아이들도 다 놀아버리니 같이 노는 친구도 많다.
일례만 들었지만 그냥 이런 이야기들이 담긴 책이다. 등장인물이 각각 개성적이라 노는 방법이 다르고, 그 노는 것이 사회가 용인하는가 아닌가가 들어간다. 그러면서 회고를 담았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1년 전에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삶의 태도가 어쩌면 나한테, 그리고 아내한테 이전됐고, 우리의 태도가 다시 아이들에게로 간다. 우리가 죽더라도 내 삶의 방식과 생각은 아이들에게 이어진다. 삶은 끊임없이 이어질 뿐 당대에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참고서는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한국 사회가 엉망이라고 꾸짖는, 헬조선이라고 외치는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과연 당신은 지금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아! 써놓고 보니 완전히 꼰대 같네. 역시 이 주제는 망할 수밖에 없다니까.
박철현(노가다 뛰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