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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베를린의 분짜, 냉전과 분단의 차가운 맛!

등록 2018-09-12 20:22수정 2018-09-12 20:34

김태권의 고기고기 여행
김태권 그림.
김태권 그림.

돼지고기를 달고 짭짤한 양념에 재워 바짝 구워요. 쌀가루로 바게트를 만들어 세로로 가른 다음, 이 돼지고기를 채워 넣습니다. ‘반미’라는 베트남의 별미입니다. 서양 맛 같기도 동양 맛 같기도 하죠.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트남의 반미’는 집 근처 베트남 맛집에 적힌 소개 문구입니다. 웃을까 울까 망설였지요. ‘반미’라는 말을 보고 공교롭게도 베트남과 미국과 한국의 슬픈 역사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국수 요리 ‘분짜’가 비슷한 맛이 납니다. 돼지고기를 기름 맛이 안 날 정도로 석쇠에 구워 싱싱한 채소와 함께 접시에 담습니다. 민트와 고수를 곁들이면 더 좋고요. 여기에 쌀국수를 함께 올립니다. 달고 짭짤한 양념장에 찍거나 비비며 즐기는 일종의 비빔국수입니다. 베트남 비빔국수로 소개한 가게도 많더군요.

같은 베트남 쌀국수지만 분짜와 ‘포’는 고기부터가 다릅니다. 베트남의 분짜 골목은 가게마다 석쇠에 돼지고기를 구워대는 통에 거리가 연기로 자욱하다고 하네요.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양념 고기 굽는 냄새에 발길이 끌리는 건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반면 포는 얇게 저민 소고기를 뜨거운 육수에 담가 먹는 샤부샤부 같은 국수죠.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 더부룩하던 속도 시원하게 풀리지요.

우리가 익숙한 쪽은 포. 제 기억으로는 20년 전부터 미국계 체인을 통해 한국에도 널리 퍼졌습니다. 파리의 베트남 쌀국수 골목도 포가 대표메뉴랍니다. 그런데 분짜는 아직 낯선 음식이에요. 나는 베를린에 가서야 분짜에 맛을 들였습니다. ‘왜 서울에서는 못 먹어 보았을까’ 의아해하면서요. 양념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 입맛에 잘 맞는데 말이죠.

궁금증을 풀 실마리를 올여름 한 시사 잡지를 읽다가 얻었습니다. 내공 깊은 여행작가 ‘환타’가 쓴 글이었어요. 1990년대 홍콩의 베트남 식당가에서 분짜를 찾았는데 먹지 못했대요. 왜일까요. 식당 주인의 설명인즉 “분짜는 북베트남 하노이의 음식인데, 홍콩에 사는 사람들은 남베트남 유민들이기 때문”이래요. 글 제목부터가 ‘베트남 음식에서 난민을 읽다’.

이 글을 읽고 의문이 풀렸습니다. 서울에 없던 분짜가 머나먼 베를린에 있던 이유는 냉전 때문이었던 거죠.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 베트남의 학생들은 서방으로 유학할 길이 막혔습니다. 그때 베트남의 똘똘한 젊은이를 받아주던 곳이 동베를린. 그러던 중 동독이라는 나라가 무너졌고, ‘천지개벽’을 경험한 적지 않은 베트남 유학생이 베를린에 눌러앉았다고 하네요.

북베트남 음식인 분짜가 베를린에서 인기를 누리게 된 사연일 겁니다. 동서냉전 때문에 동쪽 진영은 북베트남, 서쪽 진영은 남베트남의 음식부터 먹던 셈이랄까요. 프랑스와 미국을 통해 포부터 한국에 들어온 것도 마찬가지 이야기인 거죠.

때로는 분짜처럼 차갑게 때로는 포처럼 뜨겁게 20세기 후반을 쥐락펴락하던 냉전도 이제는 끝. (한반도만 빼고요.) 그리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지요. 나중 사람들은 21세기를 이주의 시대로 기억하지 않을까요. 환타 작가의 글에 따르면 ‘한국에서 분짜 식당을 연 사람들은… 경제 개방 이후 대거 외국인 노동자로 밀려들어 온 북베트남 사람들’. 결혼 이민으로 한국에 온 베트남 사람도 많고요. 먹음직스럽게 구운 돼지고기에 고수와 민트를 올려 차가운 국수에 얹어 먹으며(덮밥으로 먹어도 맛있어요) 냉전 이후 우리가 사는 시대를 생각합니다.

김태권(먹기 좋아하는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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