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한국을 찾은 ‘러쉬’의 ’윤리 구매 책임자’ 사이먼 콘스탄틴.
영국의 천연 화장품 브랜드 ‘러쉬’(LUSH). ‘신선함’을 뜻하는 이 브랜드는 1995년 영국에서 설립된 뒤, 자연 성분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색상의 비누·고체형 샴푸 등이 인기를 얻으면서 규모가 커졌다. 현재 영국을 비롯해 54개국에서 1000여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업계 전문가는 러쉬가 단기간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사회적 가치를 강조해온 점을 꼽았다. 성별, 나이, 인종에 상관없이 폭넓은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제 러쉬는 설립 초기부터 ‘환경’, ‘동물 보호’, ‘인권’의 중요성을 줄곧 강조해 왔다. 화장품 개발 과정에서 동물 실험을 금지하고, 환경을 해치는 과대 포장을 줄이는 건 기본이다. ‘의식’있는 소비문화를 이끈 이 독특한 기업의 정체가 궁금하다.
러쉬가 원료를 구하는 과정은 까다롭다. 장미 향이 필요해서 장미 꽃잎을 구해야 한다면 공정 과정부터 따진다. 아동 노동 착취는 없었는지 등을 면밀히 살펴본다. 이 때문에 원재료를 대량 공급하는 대형업체에 위탁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생산자로부터’, ‘직접’ 구매하는 형식을 고집해오고 있다. 지난달 24일 한국을 찾은 ‘윤리 구매 책임자’ 사이먼 콘스탄틴이 책임자다. 러쉬 창립자인 마크 콘스탄틴의 장남인 그는 윤리적인 조건에 적합한 원료만 있다면 오지도 마다하지 않고 세계 각국을 누빈다. 콘스탄틴은 “기존기업들이 해왔던 대로 수익 일부를 사회에 기부하는 식으로는 근본적 문제를 바꾸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윤리 구매’를 내세우는 러쉬. 이 독특한 과정을 이끌고 있는 콘스탄틴을 중구 장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첫 한국 방문이라는 그는 “생동감과 희망이 넘치는 나라인 것 같다”며 밝은 표정으로 첫인상을 밝혔다.
-한국 여행은 했나? 둘러본 소감은?
“한국에 있는 모든 러쉬 매장을 둘러봤다. 빠르고 경쾌하게 착착 돌아가는 모습에서 한국 특유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느꼈다. 비무장지대(DMZ)에서도 인상도 비슷했다. 분단국가라서 다소 어두운 분위기이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실상은 정반대였다. 색색의 바람개비들이 돌아가고, 가족 단위로 놀러온 사람들의 표정도 밝았다. 전시 때 실제 사용됐던 ‘땅굴’ 체험도 할 수 있더라. 아직 종전된 상황도 아닌데 비관하지 않고 역사의 상흔을 마주 보는 자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러쉬는 화려한 색상의 제품으로 유명하다. 색에 대해선 남다른 감이 있을 거 같다. 한국을 색에 비유한다면 어떤 색인 것 같나?
“천연색 그 자체다. 그동안 한국에서 일어났던 촛불혁명, 미투운동 등을 뉴스로 전해 들으면서 ‘한국은 모든 게 가능한 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에 반해 유럽은 꿈이나 가능성이 많이 사라진, 잿빛 느낌이다.”
- 직접 원료를 구매하러 다니는 걸로 유명하다. 특별한 계기가 있나?
“시기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러쉬가 설립된 후 아버지의 전 동료 제프 브라운이 찾아 왔다. 우리가 제품을 만들 때 사용하는 향료를 테스트해 주겠다고 했다. 원료 전문가였던 그에 따르면 향료 시장에서는 첨가물이 더해진 향료를 원액이라고 속여서 파는 식의 비도덕적인 일이 빈번하다고 했다. 실제로 당시 그가 우리 향료를 테스트해 보니 가짜 첨가물이 발견됐다. 이를테면 장미 원액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화학첨가물이 절반 이상이었던 거다. 이를 계기로 직접 눈으로 보고 신뢰할 수 있는, 공급자를 찾아 나서게 됐다.”
- 올해부터 천연 운모(지층 암석을 이루는 광물 중 하나)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데.
“좋은 원료라도 비윤리적인 과정을 거쳐 생산된다면 사용하지 않는다. 광물에서 추출한 운모는 반짝이는 성분으로 화장품 등에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하지만 깊숙하고 좁은 동굴 안에서 채굴해야 하기 때문에 주로 어린아이들이 동원된다. 운모의 최대 생산지는 인도인데 유통 과정에 마피아의 개입이 있어 공급 과정이 투명하지 않았다. 결국 지난 1월부터 천연 운모를 합성 운모로 바꾸게 됐다. 천연 운모가 가진 광택을 그대로 낼 수 있도록 미네랄을 합성한 성분으로 만들었다. 다시 바다로 흘러가도 해양 환경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콘스탄틴은 윤리적인 조건에 적합한 원료만 있다면 오지도 마다하지 않고 세계 각국을 누빈다. 사진 러쉬 코리아 제공
-신념도 중요하지만 사업인 만큼 수익을 내야 하는 거 아닌가? 부담감은 없었나?
“흔히 사람들이 사업을 얘기할 때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고, 대단한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렇게 규정짓는 순간 오로지 이윤 창출을 위해 비인간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커진다. 돈 때문에 자연도 파괴되고 아이들이 혹사당하기도 하는 거다. 그게 싫었다. 오히려 원료 공급자를 사적이고 인간적인 마음으로 대할 때 더 책임감 있고 건강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한다. 소비자와 생산자, 원료 공급자 등, 사업에 연관된 모든 이들과 환경까지도 생각하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콘스탄틴은 “많은 기업이 대외적으로는 윤리 의식을 가지고 사회 환원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수익 일부를 사회에 기부하는 선에서 만족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고 덧붙였다. 정작 ‘진짜’ 문제는 수익을 내는 과정에서 발생할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고치지 않는 상황에서 기부금 몇 푼으로 세상을 좋게 만들기 어렵다는 얘기다.
1995년 러쉬가 설립되던 때 콘스탄틴의 아버지 마크 콘스탄틴을 비롯한 창업자 6명은 슈퍼마켓에서 레몬, 계피 등의 신선한 재료를 사 비누를 만들었다. 이 무렵 만들어진 브랜드의 이념은 ‘위 빌리브’(We beilieve·우리는 믿습니다)다. 재료의 신선함은 정직함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은 자연스럽게 친환경적 경영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일례로 1988년 제조 특허권을 획득한 고체 샴푸 바는 액체 샴푸에 들어가던 화학성분이 빠졌다.
지난 8월 콘스탄틴이 캄보디아의 한 사원을 그린 스케치. 사진 러쉬 코리아 제공
지난 7월31일 콘스탄틴이 베트남에서 그린 스케치. 사진 러쉬 코리아 제공
- 원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러쉬를 설립할 때부터 친환경적 경영을 강조한 부모 밑에서 자연스럽게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현재 가장 관심을 갖는 분야는 환경과 도시재생이다. 환경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필수 조건이다. 환경보호는 결국 인권과 이어지는 얘기다.”
콘스탄틴은 현재 러쉬에서 조향 파트도 함께 이끌고 있다. 모든 제품의 향기가 그를 거쳐 탄생한다. 대학 시절 미술을 전공했던 그는 향수를 만들 때 어떤 전위적인 미술보다도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했다고 한다.
- 제품의 원료를 구하러 다니면서 조향을 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조향사로서 역량을 갖추려면 원료의 조합에 따라 어떤 향이 난다는 식의 공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원료 자체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훌륭한 요리사가 재료에 대해 예민하듯 말이다. 원료를 구하는 여정에서 다양한 나라를 방문하면서 해당 지역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고 그런 경험들이 특별한 향기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결국 좋은 원료를 고를 수 있다면 좋은 향수를 만들 수 있다는 뜻 아닐까 싶다.”
- 기억 나는 나라가 있다면?
“지난달 캄보디아의 이름 모를 사원에 가게 됐다. 단순히 관광지일 줄 알았는데 많은 이가 고요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 장면에서 말 못할 감동을 받았다. 그런 순간마다 그림으로 남기곤 했다. 이렇게 영감 받은 기억들이 조향을 할 때 도움 된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대표적인 향수가 ‘더 스멜 오브 프리덤’(The Smell of Freedom·자유의 향기)다. 2011년 만들어진 이 향수는 콘스탄틴이 원료를 구하기 위해 다닌 여정에서 우연히 만난 세 명의 인물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티베트에서 탈출한 승려, 인종차별을 당하는 호주 원주민 등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정치 탄압과 핍박을 받았음에도 그 상황을 이겨낸 사람들이다. 이 향수 판매 수익금을 자유를 꿈꾸며 한국을 찾은 탈북 청소년들을 지원하는 ‘두드림’ 캠페인에 전액 기부했다.
콘스탄틴은 “사람들이 향수를 사용할 때마다 잠깐이라도 자유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한 번만 생각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달 24일 한국을 찾은 ‘러쉬’ ’윤리 구매 책임자’ 사이먼 콘스탄틴.
‘우리 화장품을 바르면 아름다워진다’는 선전이 화장업계 통상적인 광고다. ‘우리 화장품을 사용하면 당신과 세상이 함께 아름다워진다.’ 그가 러쉬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김포그니 기자 pognee@hani.co.kr, 사진 임경빈(스튜디오 어댑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