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도하공원’을 찾은 하림. “날이 더워도 공원 바람이 좋다”는 그는 “이런 동네 공원이 많아지면 좋겠다“며 악기 연주를 시작했다. 이재훈(스튜디오 시믈)
’거리의 악사’. 야외에서 불시에 공연을 하는 음악인을 두고 나온 표현이다. 독일 미술가 칼 스피츠베그가 1860년 제작한 유화의 제목으로도 이 표현이 등장했다. 과거에도 불특정 다수가 모인 공터에서 음악인이 악기를 연주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국내 ’원조’ 버스킹으로 알려진 가수 하림은 "최근 들어 버스킹을 좋아하는 이들이 늘었지만, 그 문화가 구체화될 만한 공터가 부족한 게 사실"이라며 공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가수 하림(42)은 공원과 인연이 깊다. 데뷔 앨범에 수록된 자작곡 ‘출국’, ‘난치병’ 등이 대중적 인기를 얻었지만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보다는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앞 놀이터 공원을 주로 찾은 게 시작이었다. ‘버스킹(거리 공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2006년 본격적으로 버스킹을 시작하면서 거리공연의 붐을 일으키는 데 한몫했지만, 때마침 홍대 상권이 ’뜨는’ 바람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높은 월세를 감당 못하고 쫓겨나는 모습도 지켜봐야만 했다.
2010년 문화예술기획사 ‘아뜰리에 오’를 설립한 그는 2012년 금천구로부터 버려진 공터를 1년간 빌렸다. 2010년 6월까지만 해도 육군 도하부대가 주둔했던 이곳은 하림에 의해 음대, 미대 졸업생들의 전시회와 동네 주민을 위한 버스킹 공연이 진행되는 문화 상생터로 변신했다. 군인들이 쓰던 목욕탕은 전시관으로, 폐허가 된 운동장은 주민들을 위한 공연장으로 쓰였다. 그러나 개발을 앞두고 한시적으로 빌린 땅이었던 탓에 이 프로젝트도 일년 만에 끝났다.
그림자가 있다면 빛도 있는 법. 버려진 공터에서 일년간 문화를 경험한 지역 주민들의 요청에 의해 이곳은 아파트 촌으로 개발되는 대신 작은 동네공원 ’도하공원’으로 재탄생됐다. 그 뒤로 하림은 "예술가들과 지역 주민이 자연스럽게 상생할 수 있는 공간을 고민하게 됐다"고 한다. 지난 8일 서울 금천구에 위치한 도화공원에서 그를 만나 공원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봤다. 이 자리에서 하림은 "도심 속 작은 공원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원래 공원을 좋아하는 편이었나.
"어릴 때 공원 근처에 살았던 적이 있는데, 거의 가보지 않았다. 그만큼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다."
- 공원에 관심을 갖게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몇 해 전 잠시 우울했던 적이 있다. 평소대로 술과 담배를 사면 됐는데, 문득 화분을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라벤더를 심어서 키워봤는데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푸른 풀잎을 하루 종일 바라본 적도 있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발길이 공원으로 향하게 됐다. 아마 도시인의 메마른 정서가 무의식적으로 자연을 좇다보니 식물을 키우고, 자연이 녹아든 공원을 찾게 되는 것 같다."
- 지자체 실무자들에 따르면 도심에서 공원을 새로 만드는 게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도시에 길 모퉁이가 많아져야 한다’고. 정말 맞는 말이다. 광장에서 평지를 바라보는 것보다는 골목 어귀, 공원 구석에 피어있는 꽃을 바라볼 때 인간은 큰 감동을 받는다. 시선이 멈춘 곳에서 비로소 생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원도 무조건 광장의 형태로 만들기 보다는 아파트 정원, 학교 정문 앞 공터 등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익숙한 곳을 공원화 하는 게 좋지 않을까."
- 기존의 공간을 공원으로 바꾸자는 뜻인가.
"미국 뉴욕, 영국 런던, 캐나다 벤쿠버 등 외국은 대부분 집 근처에 담장 없이 개방된 형태의 공원이 있다. 반면 우리의 경우 서울숲공원처럼 자랑할 만한 큰 공원이 있지만 대부분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거나 주택지와 붙어있는 경우가 별로 없어 접근성이 떨어진다. 때문에 당장 일상에서 마주하는 주변의 것들을 고쳐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아파트의 주차장만 해도 조경을 한다면 충분히 아름다운 공원으로 거듭날 수 있다."
’원조’ 버스킹 가수로 유명한 그는 지난 5월 남원 춘향제를 찾아 깜짝 공연을 했다. 하림 제공
하림은 멀리 가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의미를 찾아 보기를 권했다. "빛이 드는 베란다에 재활용 쓰레기를 쌓아두는 걸 보면 안타깝다. 집안에서도 나만의 공원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조경에 신경만 쓴다면 아이들의 학교 운동장도 생생한 ’작은’ 자연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아직 날이 덥지만 공원 바람이 좋다"며 자신의 악기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평소 악기를 가지고 공원에 나올 때가 많다고 한다.
그의 작업실에 있는 화초. 하림은 ″원예를 통해 나만의 작은 공원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재훈(스튜디오 시믈)
- 공원에서 하는 공연은 무대 공연과 어떤 점이 다른가.
"공원만의 자연스러움이 있다. 사람들이 편한 자세로 널브러진 채로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을 듣고, 동행자와 하던 대화를 이어간다. 가수는 하늘과 풀잎을 보며 악기를 연주한다. 오랜만에 자기만을 위한 음악을 할 수 있다. 이때 아무리 비싼 스피커도 표현할 수 없는 악기의 생생한 소리가 자연 속에서 울려 퍼진다. 연주하는 이도, 듣는 이도 행복해지는 순간이다."
하림에게는 4년간 키운 붉은 장미가 있다. 키우기 까다로운 식물이지만 비결은 따로 없다고 한다. 빛과 바람, 물이 전부다. 이처럼 "인공 하천에서는 물고기가 알을 낳지 않듯이, 뭐든 생명은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나온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사람은 본래 자연 속에서 나고 자랐다. 하림은 "일상 속에서 풀잎과 하늘을 보는 시간이 많아져야 한다"고 말한 뒤, 도하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섬세한 현의 소리가 들려왔다.
김포그니 기자 pognee@hani.co.kr
공원
시민의 휴식을 목적으로 조성한 넓은 정원이나 장소를 뜻한다. 과거엔 공원을 주로 산책하는 공간으로 여겼다. 최근에는 직장회의, 독서, 요가 등 그 사용 영역이 확장됐다. 도시에서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에 사람들이 부담 없이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을 펼쳐 보이게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