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엑스아이(EXID)의 엘리(LE). 출처 바나나컬쳐엔터테인먼트 누리집.
얼마 전에 발간한 인터뷰 책 <아이돌의 작업실>에 꼭 넣어야 할 사람이 있었다. 걸그룹 이엑스아이디(EXID)의 엘리였다. 다른 네 명의 남성 인터뷰이는 소속사와 팬들의 적극적인 홍보 덕분에 작사 및 작곡, 프로듀싱한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대중에 알려져 있었지만, 엘리의 경우는 달랐다. 섹시한 춤을 추는 걸그룹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10대 중반부터 랩을 하고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엘리만의 서사는 잊혀가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책을 읽은 독자 중 다수가 비슷한 반응이었다. “엘리가 노래를 이렇게 많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어요.”
음악을 만드는 여성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이야기는 이상할 정도로 찾아보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7월 말 현재 음원차트 상위권에 있는 걸그룹 멤버들과 보이그룹 멤버들을 비교해보면 직접 음악 작업을 한다고 알려진 남성 아이돌들에 비해 여성 아이돌의 숫자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나마도 몇 안 되는 이들이 보여주는 음악적인 능력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내 다리를 봐’처럼 섹시 코드를 강조한 노래를 불렀던 달샤벳의 멤버 수빈은 2017년에 작사, 작곡, 프로듀싱까지 맡은 솔로 앨범 <동그라미의 꿈>을 냈다. 피아노 한 대, 어쿠스틱 기타 소리 등 단출한 연주에 기대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은 달샤벳 안에서의 이미지와 정반대다. 그러나 여전히 포털 검색창에 ‘달샤벳 수빈’을 입력하면 몇 년째 연관 검색어로 ‘몸매’만 뜬다. 음악을 만드는 것으로 알려진 남성 아이돌들의 연관 검색어에 꾸준히 ‘작곡’, ‘프로듀싱’ 등이 뜨는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미디어가 여성의 외모만을 강조해서인지, 사람들이 여성 아이돌의 음악적 역량에 관심이 없어서 미디어가 그들의 외모에만 집중하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여성 아이돌 중에도 음악을 만들고 싶고,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엘리나 수빈 이외에도 티아라 멤버였던 효민, 원더걸스 출신 핫펠트(예은), 최근에는 ‘(여자)아이들’의 전소연 등이 자작곡을 선보였다. 핫펠트와 함께 원더걸스 멤버였던 유빈은 음악가들이 자유롭게 자신이 만든 음원을 공유하는 플랫폼인 ‘사운드 클라우드’에 자신이 만든 작품을 올리기도 했다. ‘프리스틴’ 멤버들은 후배 그룹인 ‘프로미스 나인’의 곡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물론 곡의 완성도가 높지 않을 수도 있다.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보면 비판받을 수 있는 음악을 여성 아이돌들이 스스로 생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논의조차도 일단은 그들이 만드는 음악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져야만 가능해진다.
이 와중에 올해 데뷔한 ‘(여자)아이들’의 멤버 전소연에게 ‘작곡’과 외모 변화에 관한 검색어가 함께 나오기 시작했다. 각종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을 통해 이미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보여줬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가 만든 ‘라타타’가 음악 방송에서 1위까지 차지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여성 아이돌을 바라보는 미디어와 대중의 시선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다는 신호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정작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여성 아이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다. 나인뮤지스의 멤버였던 류세라는 한 인터뷰에서 “‘쟤는 아이돌 출신이야’, 저는 이런 편견과 싸우는 것에 익숙해요”라고 말했다. 현재 그는 혼자서 음악을 만들고 공연하러 다닌다. 음악 작업을 시작으로, 성별에 씌워져 있는 한국 사회의 편견을 부숴나가는 멤버도 있다. 머리가 짧고 보이시한 옷차림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여자 같지 않다’는 눈초리를 받던 에프엑스 엠버는 2016년 3월에 발매한 곡 ‘보더스’의 가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데?’ 그리고 2017년 10월, 그는 유튜브에 ‘내 가슴은 어디 갔지?’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올렸다. 이 영상에서 엠버의 친구들은 “내 친구 엠버의 가슴이 어디 갔는지 아세요?”라고 묻는다. 핫펠트는 여성 음악가로서 자신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해나갈지 여러 차례 언급했다. 아이돌에 대한 편견, 여성에 대한 편견과 이중으로 싸우고 있다는 소리다. 남성 아이돌들에 비해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해도, 일단 한다. 이토록 활기 넘치는 여성들의 서사에 한 번 관심을 가져볼 만하지 않은가. 다들 쉽게 잊히기에는 너무 아까우니까.
박희아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