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에 있는 ‘적량횟집’의 갯장어 샤브샤브. 사진 김현정 요리사 제공
통영에 내려와서 처음 보낸 겨울을 기억한다. 바다가 푸르게 보란 듯 펼쳐져 있고, 그 옆 붉은 황토밭엔 초록보다 더 진한 시금치들이 파릇파릇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추운 계절 푸른 전경이 생소했다. 남해에 유자를 사러 갔을 땐 바람결에 마늘 냄새가 났다. 동행한 지인이 근처에 마늘밭이 있을 거라고 했다. 사십이 넘어 처음 가 본 거제는 신비할 정도로 아름다웠는데, 해금강이 특히나 좋아서, “섬에도 강이 있네요”라고 묻자 주변인들 표정이 이상했다. 바다의 금강산(만큼 아름답기에)이라서 해금강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우짜겠노, 서울 촌사람인걸. 낯설고 물선 고장에서의 생활은 놀라움의 연속이었고, 이제는 제법 일상이 된 남쪽 바닷가 살이 3년 차다.
올해 장마는 예년에 비해 짧았다. 여름과 더위는 빠르게 왔고 강렬하다. 폭염이 며칠째 인지 따질 수도 없기에, 내 기억은 겨울을 애타게 부르고 있다. 살을 에는 듯한 바닷바람 한줄기가 그리운 날들이다. 이토록 덥지만 힘든 일만 있겠는가. 휴가나 먹거리 등, 여름의 특권 또한 셀 수 없이 많으니 힘을 내어보자! 이 또한 지나가리니!
통영에 처음 왔을 때 지인들은 계절 먹거리로 인사말을 대신했다. “도다리쑥국 먹었어? 봄이 왔으니 한 그릇 먹어야지.” “물메기(곰치)탕 더 추워지기 전에 같이 먹자” 등. 이제는 나도 이 화법에 제법 익숙해졌다. 그렇다면 이 여름의 계절 음식은 무엇인가?
처음 시장에서 아주머니들이 무를 나붓나붓하게 썰어 파는 걸 보고 놀랐었다. 무가 아닌 박나물이었다. 홍합과 볶아 먹으면 아주 맛있는 여름 반찬이다. 사슴뿔과 비슷하게 생긴 해초 청각은 마상이(매생이)와 파래만 먹어봤던 내겐 너무나 큰 바다풀이었다. 고구마 줄기로 담근 김치는 또 어떠한가. 도처에 고구마가 자라는 논밭이 있다. 척박한 땅에서 줄기를 소진하는 방편으로 유용했으리라.
이런 계절 반찬이 먹고 싶을 때 나는 ‘팔도식당’(통영시 안개2길)에 간다. 1인분씩 주문 가능한 ‘오늘의 정식’ 메뉴에 나오는 국과 (대부분 생선)조림은 매일 바뀐다. 주인이 재료 하나하나를 허투루 쓰는 법이 없는 지역민이 사랑하는 로컬 맛집이다. 혹시 택시를 탄다면 상호만 얘기해도 팔도식당에 도착할 수 있다. 정말이다. 지난 19일에는 쑥갓이 한가득 올라간 ‘눈볼대 매운탕’이 나왔다. 눈볼대의 쫄깃한 식감과 쑥갓의 향이 밥을 계속 부르는 마법의 탕이다. 아침 식사도 가능하고 정월 대보름엔 오곡밥, 설날엔 떡국 등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집 떠나 엄마 밥이 그리운 이들에겐 더없이 훌륭한 식당이다.
통영에 있는 ‘팔도식당’의 ‘눈볼대 매운탕’. 사진 김현정 요리사 제공
남해의 ‘적량횟집’(창선면 흥선로)이 문을 열었단 소식을 들었다. 이곳은 6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1년 중 3개월만 영업하는 곳이기에 가고픈 맘이 있어도 휴가 다녀오면 이미 그해 영업은 종료되기 일쑤인 곳이다. 올해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지난 17일 찾아 나섰다.
마주 오는 차라곤 한 대도 보이지 않는 인적 드문 산속을 계속 달리다 보면 이런 곳에 횟집이 있을 리가 하는 의구심이 확신이 설 무렵, 한 손에 폭 담을 수 있을 듯한 바다 마을이 나타난다. 포구에 정박한 배는 빽빽하게 서 있어도 10여척 남짓이다. 식당도 2~3개뿐인데 그중 적량횟집이 가장 크다. 예전에는 횟집도 운영했었지만 지금은 갯장어(하모) 샤브샤브와 갯장어 회만 취급한다고 한다. 주인은 샤브샤브를 주문한 내게 “예약을 안 하고 왔으니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라며 수줍게 웃는다. 나온 찬에는 갯장어회, 문어, 병어 뼈째회(세고시, 세꼬시)가 포함돼 있다. 신선도며 담은 모양새가 집주인의 솜씨를 가늠케 한다. 하긴 20년 동안 장사를 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3개월만 영업해도 유지가 되니 말이다.
샤브샤브가 나오니 국물 안에 수삼이 꽤 많이 들어 있었다. 국물 맛을 먼저 보니 인공 조미료 가미는 없는 맑고 깔끔한 탕이었다. 주인은 갯장어를 한 번에 한 개씩 젓가락으로 잡고 휘휘 저어가며 3초만 익히라고 설명했다. 그대로 따라 해보니 껍질은 안으로 말려가고 장어 살은 크게 부풀어 오르며 꽃처럼 피어났다. 갯장어 살에는 얇고 가는 뼈들이 속속 박혀 있는데, 이 계절에는 뼈가 아무리 연해진다 한들 마리당 200~300번의 잔칼질로 이 뼈들을 끊어주지 않으면 먹기 쉽지 않다는 게 주인의 설명이었다. 입안 한가득 넣고 두세 번 씹으니 사르르 없어진다. 부드럽다. 껍질이 없다면 형체 유지가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연신 젓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고추냉이나 초고추장 쌈장 얹어 채소에 싸서 먹어봤다. 갯장어를 다 먹자 죽을 끓여 줬는데 수삼의 은은한 향이 제법 잘 어울렸다. 밑반찬도 발군이었다. 특히 총각김치와 김장김치가 맛있는데, 젓갈 향이 깊었다. 어떤 젓갈을 사용하시는지 물으니 직접 담근 멸치젓갈을 쓴다고 주인은 말했다. 역시나 남해는 멸치의 고장이다.
장어를 넣어 끓인 탕. 사진 김현정 요리사 제공
식사 후 식당 앞 평상에 잠시 앉았다. 옆에 있는 아름드리나무가 그늘을 만들었고 햇볕은 강하지만 바닷바람이 살랑거려 더운 줄 몰랐다. 나는 ‘여름 보양식을 오롯이 비워냈구나’ 하며 히죽 웃었다. 맛있었기에 기분이 꽤 좋아진 것이다.
여세를 몰아 거제로 직행했다. 돌장어 조업을 보기 위함이었다. 크기는 작지만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난다는 지인의 칭찬이 내 호기심을 발동시켰다. 거제 청곡마을에 있는 돌장어 어업을 하는 곳은 커다란 작업장일 줄 알았는데 마당 넓은 가정집이었다. 그늘막이 넓게 쳐있었지만 장어를 손질하는 일꾼들의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언뜻 보니 너무 작다. 하지만 물어보니 35cm가 넘었다. 장어를 펼치니 그 길이었다. 그 크기 이하의 돌장어는 바다에 다시 풀어놓는다고 한다.
장어는 야행성이라 밤 8시부터 대략 11시까지 먹이 활동을 한다. 그 시간에 입질이 가장 자주 온다고 한다. 설명을 듣고 있는 동안 궁금해졌다. 낮에 장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모래 속이나 바위틈에서 하얀 배를 드러내고 잠을 자는 걸까?
더운 여름날, 내가 원하는 것을 장어는 태생적으로 하면서 살고 있다니. 한없이 부러운 녀석이다.
거제 청곡마을에 있는 장어잡이 배. 김현정 요리사 제공
딴생각을 걷어내고 어부에게 질문했다. “우리가 흔히 먹는 아나고(붕장어)회 라는 것이 돌장어를 일컫는 것인지요?” 나의 물음에 딴 얘기가 돌아왔다. “껍질을 벗겨낸 후 세꼬시(뼈째회) 혹은 다져서 먹는 아나고(붕장어)회는 이 크기가 육질이 가장 단단해 맛있다”라고 말이다. 살은 구워서 먹고, 머리와 뼈는 끓여 먹으면 좋다고 주인이 말해서 장어를 5kg만 주문했더니 바닷물에 네 번 바락바락 씻어 줬다. 이 집의 장어처럼 신선한 놈을 파는 곳은 거제중앙로에 있는 ‘장어한마리’라고 한다.
통영에선 보통 무와 고춧가루를 넣어 장어탕을 끓이는데, 알려주신대로 한 솥 끓여 친구들과 나눠 먹어야겠다. 올여름은 한참 더워서 꽤 지난하다고 느낄 테니 말이다.
김현정 요리사
이순신 장군도 만나고 맥주도 마시고!
◇ 통영 한산대첩축제
8월10~14일 해안로 문화마당·병선마당, 통제영, 이순신공원 등에서 열린다. 한산대첩의 역사적인 현장을 재현해 볼거리를 선사한다. 조선시대 통제사가 경상·전라·충청의 삼도수군을 통영 앞바다에 집결시켜 군사를 점검하는 군점 행사,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 행렬, 한산대첩 모습 재현 행사 등이 통영 강구안에서 펼쳐진다. 수군 체험, 수군 노젓기대회, 카누 노젓기대회 등도 진행된다.
◇ 창원 비어&뮤직 페스티벌
8월15~19일 창원 중앙역 인근 특설무대. 1만원짜리 티켓을 사서, 맥주를 마시며 다양한 음악공연과 신나는 춤, 마술공연 등을 즐길 수 있는 축제다.
◇ 거제 해양스포츠축제 ‘바다로 세계로’
7월26~29일 거제 구조라해변, 학동몽돌해변, 지세포항, 종합체육관 등 거제도일대. 다양한 해양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25회째 축제다. 드래곤보트대회, 비치풋살대회, 핀수영대회, 수상오토바이대회, 맨손으로 고기잡기 등 갖가지 행사가 펼쳐진다. 26일 저녁 종합운동장에서는 휘성 등 가수들이 출연하는 ‘블루 콘서트’가 열린다.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남해안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부산광역시에 이르는 우리나라 남쪽 해안을 말한다. 수많은 반도와 만이 이어지며 복잡한 해안선을 이루며, 무수한 섬들이 어우러진 멋진 경관을 보여준다. 풍부한 해산물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음식과 즐비한 볼거리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안관광 벨트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