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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페미니즘 시대, 로맨틱 코미디 종언을 고하다!

등록 2018-07-18 20:29수정 2018-07-18 20:42

너 어디까지 해봤어?
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 포스터. 티브이엔 제공
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 포스터. 티브이엔 제공
티브이(TV)드라마 연속극 남자 주인공 중 다수는 ‘실장님’이라고 불린다. 그는 대체로 재벌 2세나 3세로, 자기가 물려받게 될 회사에서 빠른 승진 혹은 낙하산 인사를 통해 젊은 나이에 실장 자리에 앉아 나이 많은 부하 직원들을 거느리고 일한다. 그와 사랑에 빠지는 여자 주인공은 똑똑하고 아름답고 착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으며, 많은 경우 그녀는 사랑의 성취와 결혼이 가져다주는 사회적 지위 향상을 동시에 획득한다. 아주 오랫동안 이런 구도의 사랑 이야기를 별 불편 없이 즐겨왔다. 그러던 어느 날, 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를 보려다 정신적 소화불량을 발견했다. 주인공인 부회장 이영준을 연기하는 박서준과 사랑에 빠지는 비서 김미소(박민영)에 감정 이입하기가 쉽지 않아진 것이다. 좋은 마음이 생기다가도 갑자기 현실이 뺨을 후려친다.

최근 재벌에 관련된 한국의 뉴스는 경제면만큼이나 사회면에 실리는데, 그 일가가 ‘사랑하고 싶은’ 면모라고는 갖추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노령의 남성인 항공사 회장님을 ‘남자친구처럼’ 대하라는 요구가 젊은 여자 승무원들에게 주어졌다는 말이 뉴스를 통해 보도될 때, 거기에는 사랑이 아니라 밥벌이의 어려움과 불쾌함만이 가득하다. 남성 정치인의 출장지 숙박 예약을 여성인 비서가 진행했다는 사실(남성이든 여성이든 최고위층 인사를 보조하는 비서들이 모두 하는 일인데도)이 후일 두 사람 사이의 성폭행 재판에서 대단한 ‘호의’의 증거처럼 사용될 때도 마찬가지의 참담함을 느낀다. 많은 남성이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여성을 동료로 보는 대신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잠재적 연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고 그것이 각종 성범죄의 핑계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도대체가 ‘심쿵’ ‘로맨틱’ ‘성공적’ 같은 생각을 하기 어려워진다. 가장 심각한 것은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인기를 끈 남자 배우들이 하나도 둘도 아니고 주기적으로 꾸준히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는 상황이 이어지는 것이다. 다 죽은 연애 세포를 깨워 설레 보려고 노력해 봐도 현실은 가혹하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벽에 거칠게 밀어붙이고 반강제적으로 키스하는 장면은 이제 ‘서투른 남자 주인공의 사랑을 위한 안간힘’이 아니라 데이트 폭력으로만 보인다.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는 것은 무섭다. 쿨하고 시크한 도시 남자인 주인공, 빨래는 할 줄 알까, 밥은 해봤을까, 아이가 울면 화내지 않고 달래줄 사람일까. 예전에 드라마 <파스타>의 주인공이었던 최현욱(이선균)은 ‘버럭 셰프’라며 소리 지르고 다니는 것도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했던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직장에서 매일 소리 지르는 직장 상사를 참고 일해야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싫다. 영화 <연애의 목적>은 직장 내 성희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교과서 수준이다.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은 강한 남성을 동경하고 사랑하며 그가 사랑할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여성으로서의 가장 큰 서사적 성취라는 공식을 갖는 로맨스는 스스로 힘을 갖고 돈을 벌어 자립하는 여성들을 격려하는 페미니즘의 시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웃기고 사랑스러운 사랑의 소동극을 그려내는 로맨틱 코미디는 이제 어떤 가능성을 갖고 있을까. 하나 분명한 것은 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이제 어렵다는 사실이다. 좋던 시절이 간 게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던 시절은 이제 끝나간다는 뜻이다. 이제부터 가능한 이야기가 뭔지는, 과거의 성공 사례를 들춰보는 것으로는 찾아낼 수 없다.

이다혜(작가·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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