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본에 갔을 때 인상적인 장면을 목도했다. 식전 댓바람부터 카페에 입장하려는 손님들이 길게, 아주 길게 줄을 서 있는 광경이었다. ‘차 마시는 행위’를 통해 위용을 과시하고자 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절(17세기)도 아닌 마당에 무슨 대기자들이 이리도 많단 말인가.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슬쩍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그곳은, 정확히 얘기하면 꽃집 안에 자리한 찻집이었다. 밖에 있는 꽃집에서는 갖가지 꽃을 팔고 투명한 유리로 지은 안쪽 찻집에서 이런저런 차를 판다. 손님들은 꽃에 둘러싸여 차를 마시는 것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근사하던지, 평소 줄을 서서 뭔가를 기다리는 걸 초개와 같이 여기던 나조차도 이 정도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겠다며 납득하고 말았다. 꽃으로 둘러싸인 찻집이라. 문득 꽃에 둘러싸인 서점이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는 꽃을 팔고 안에서는 책을 파는.
그러다가 올해 초, 20년 가까이 편집자로 일하다가 뜻한 바 있어 서울 생활을 작파하고 제주로 내려간 희진씨를 만났다. 아니지. 그녀가 제주로 내려가기 전날 밤, 신촌에서 나랑 맥주를 마셨는데 그때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제주에서는 무슨 계획이 있으신가요?” “꽃집이랑 책방을 같이 운영해 보려고요. ‘디어 마이 블루’라는 이름으로요.” 그 무렵 나는 코엑스에서 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의 부스를 ‘꽃에 둘러싸인 서점’ 콘셉트로 꾸미고 싶어서 플로리스트를 찾던 중이었다. 한데 이게 웬 운명 같은 만남이란 말인가. 그날의 술자리가 ‘1인 출판 스타트업’이라는 내 강의 뒤풀이였다는 것도 재미있다면 재미있는 일이다. 그리하여 여차여차한 과정을 거쳐 ‘디어 마이 블루’와 컬래버레이션으로 부스를 꾸미게 된 것이다.
부스의 뒤쪽 벽은 전부 생화로 장식했다. 조화가 더 비싸기도 했거니와 이왕이면 싱그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꽃은 시든다. 그 때문에 우리의 최대 고민은 ‘어떻게 해야 닷새나 되는 도서전 기간 동안 갈변의 시기를 늦출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희진씨와 함께 고속버스터미널 꽃 시장으로 향한 건 도서전 첫날 새벽 6시 즈음이었다. 미리 구입해 두면 그만큼 빨리 상할 테니 힘들어도 개장 직전에 사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스를 설치하고 다육식물을 준비하고 김탁환 작가의 신작을 생화 리스로 포장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홀랑 새고, 다음날 새벽 화훼 시장에 들렀다가 코엑스에 도착한 건 오전 7시30분. 그때부터 두 시간 넘게 스마일랙스(아스파라거스과 식물)로 벽을 꾸몄다.
작업은 도서전 첫날 개장시간인 오전 10시를 한참이나 넘겨서 마무리됐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긴 했지만 딱 부러진 확신이 들었던 건 아니다.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뚱딴지처럼 꽃이 웬 말이냐는 타박을 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 어떨까. 도서전을 참관한 한 기자는 자신의 기사에 이렇게 썼다. ‘도서전이 열리는 기간 내내 책 좀 읽는다는 페이스북 사용자들의 담벼락에는 북스피어 부스에서 찍은 사진이 줄줄이 올라왔다. 북스피어는 제주도의 꽃집 ‘디어 마이 블루’와 협업해 부스를 드라이플라워와 다육식물로 꾸몄다. 방문자들은 머리에 화관을 쓰고 찍은 사진을 저마다의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관련 기사는 많지만 하나만 더 인용해 볼까. <한겨레> 김지훈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특히 이날 도서전에선 신선한 아이디어로 부스를 꾸민 출판사들이 눈에 띄었다. 미야베 미유키 등 장르 소설에 주력해온 북스피어 출판사는 제주도에 있는 꽃집 겸 서점 ‘디어 마이 블루’와 협업해 부스를 꽃집 안에 있는 서점처럼 화사하게 꾸몄다. 드라이플라워 꽃다발(60개 한정)을 판매하면서 5만원 이상 구매자에겐 작은 다육식물(50개 한정)을 나눠줬다.‘
에스엔에스(SNS)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스 사진이 올라왔다. 그걸 목도한 수많은 독자가 우리를 찾았다. 그들 틈에 섞여, 마치 가오나시가 유바바(애니메이션 <센과 히치로의 행방불명>의 등장인물)의 목욕탕에 들어오듯 그가 우리 부스에 온 것은 6월23일 토요일의 일이다. 키는 180㎝가 살짝 넘을까. 몸에 잘 어울리는 슈트를 입었고 손에는 '007가방'이 들려 있었다. 얼굴에 수염을 길러서인지 나이는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김홍민 대표님입니까?” 그제야 나는 그가 일본인이라는 걸 눈치챘다. 명함에는 ‘의학 전문 에이전트’라고 영어로 적혀 있었다. 에이전트니까 도서의 계약 문제로 미팅을 청하러 온 건가. 그렇다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우리는 장르문학만 출간하는데, 설마 의학 미스터리 소설을 소개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잠깐 이야기 나눌 수 있습니까?” 분주했지만 궁금해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었다. “김 대표님 저를 모르지만 저는 김 대표님 알고 있습니다.” “저를요? 어떻게?” “대표님 방송 들었습니다.”
2013년 6월부터 나는 누군가의 추천으로 <에스비에스>(SBS)의 <최영아의 책하고 놀자>에서 ‘어둠의 책방’이라는 코너를 맡았다. 장르 소설과 만화를 소개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임무인데, 2주에 한 번씩 출연하여 그럭저럭 욕먹지 않고 어느새 5년째 방송국을 드나드는 중이다. 앞전에는 세미콜론 출판사의 강병한 편집장이 고정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는 열 달 동안 이 코너를 진행했다. 나는 강병한 편집장과 만난 적이 없다. 출판 동네가 좁다 보니 어쩌면 무슨 행사 같은 데서 한 번쯤 마주쳤을지도 모르지만 기억나진 않는다. 다만 그가 <책하고 놀자>를 그만둔 이유가, 서울에서의 생활을 작파하고 아내와 함께 제주도로 내려가 게스트하우스를 차리기 위해서였다는 얘기를 우연히 전해 들은 적은 있다. ‘아, 부러워라~’ 1초 만에 떠오른 감상이었다. 되풀이하지만 강병한 편집장과 나는 일면식도 없다. 얼굴도 모르는 그가 부러웠고, 나는 그 감상을 트위터에 적었다. 별 생각 없이. 한데 그 트윗이 알음알음 전해져 바다 건너 강병한 편집장에게까지 닿았고 제주에서 만났고 금방 친해졌고 지금은 격의 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인연이란 묘하다.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샜는데, 일본인 남자의 이름은 가와구치, 의학 전문 에이전트로 오랫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나를 찾아온 이유는 업무와는 상관없었다. 가와구치가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건 꽤 오래전 일이다. 대학 시절에 서클 동기들과 한국에 놀러 왔다가 게스트하우스에서 조우한 한국 대학생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자 답답함을 느꼈고 일본에 돌아가자마자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본에 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에게 맨투맨으로 지도를 받았는데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았다고 한다. 유학생이 귀국한 후에는 과외 선생님을 구하지 못해서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거나 신문을 찾아 읽었다.
<책하고 놀자>를 듣게 된 건 우연이었다. <책하고 놀자> 소개 화면에 걸린 최영아 아나운서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뭘 소개하는 채널일까’ 궁금증이 생겨서 여러 코너를 두루 들어보았는데 ‘어둠의 책방’이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년 동안 ‘어둠의 책방’을 받아쓰기하듯 옮겨 적으며 한 회도 빼놓지 않고 청취했다. 물론 목적은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저는 일본 사람이지만 일본 소설 읽지 않습니다. 미야베 미유키 누군지 모릅니다. 대표님 방송 듣고 ‘미야베 미유키’를 읽었습니다. 한국 책으로 읽었습니다. ‘덴도 아라타’도 읽었습니다. 이것도 한국 책으로 읽었습니다. 마음 아파서 울었습니다. 왜 이제 읽었을까 후회했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대표님 만나고 싶다고 생각 들었습니다. 지난 방송에서 도서전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만나러 왔습니다. 대표님 내 한국어 선생님이니까요.” 가와구치는 ‘거의’ 나무랄 데 없는 한국어로 그동안의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도쿄에서 서울까지, 나를 만나러, 일삼아 찾아 왔다는 얘기다. “아” 하는 감탄사를 연발하는 일 외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난 5년 동안 2주에 한 번씩 꼬박꼬박 공중파 라디오에 나가서 수많은 책을 소개했지만 지금껏 빈말로나마 “방송 잘 들었다, 재미있더라”는 얘기를 해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정은 피디와 강의모 작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방송을 누가 듣기는 듣는 걸까’ 하는 의구심을 가진 적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 한국 사람도 아니고 일본 사람이 꾸준히 애청했다니. 3년 동안 한 회도 빼놓지 않고. 심지어 몇월 며칠에 무슨 내용이 나왔는지, 방송을 들은 후에 흥미롭다 싶어서 산 책이 무엇인지, 갑자기 결정적인 순간에 줄거리를 딱 끊어서 밤에 듣다가 궁금해서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 등을 유쾌하게 웃으며 들려주었다. ‘어둠의 책방’ 덕분에 한국어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설명할 즈음에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한국어를 마스터 한 가와구치는 스페인어와 중국어 공부를 동시에 시작했다고 한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데 자신감에 생겼다면서.
“언어를 익히는 데 요령이 있나요?” 내가 묻자, 그는 “있다”고 단언했다. 좀 더 자세하게 들려달라고 하자 가와구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설명하기는 곤란하고 혹시 도서전을 마친 후에 시간을 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자신은 돌아오는 화요일 밤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간단다. 나는 이틀 후 월요일에 그를 다시 만나기로 했다. 점심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차근차근 들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다음날 약간 당황스러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런 내용이었다. “제가 일본에서 가져온 특별한 어학 교재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만나면 좋겠습니다. 테헤란로에 있는 페이토 리브 호텔입니다. 205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어라? 잠깐만. 지금 약속 장소를 호텔 방으로 잡은 거야? 나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나 따위를 만나기 위해 일본에서 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니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이상하고 말이 안 된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것은 전혀 이상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는데, 그 사연이 궁금하다는 형제자매님들은 가와구치 도시카즈가 쓴 <이 거짓말이 들통나기 전에>를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이 콩트는 필자가 독자들이 ‘읽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도록 다양한 소설을 색다르게 소개하는 방식인 ‘궁금증 유발적 소설 각색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