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해리 왕자와 미국 할리우드 여배우 메건 마클의 결혼식은 다양한 영국 자동차들이 자태를 뽐내는 무대이기도 했다. 전통과 역사를 중시하는 영국 왕실답게 최신형 차종보다는 수십 년간 의전에 사용해 온 영국산 차들을 이용했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실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온 벤틀리를 타고 식장에 나타났고, 해리 왕자와 메건은 빈티지 롤스로이스를 타고 식장으로 향했다. 이 차는 1950년에 생산된 로열 팬텀4(Ⅳ)로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파커 볼스 왕세자비,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빈의 결혼식에도 쓰였던 차다.
영국 왕실은 영국의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한다는 차원에서 영국산 자동차를 애용하고 홍보에도 적극 참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젊었을 때부터 애용했던 미니는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빈의 결혼 때도 웨딩 카로 쓰이기도 했다. 롤스로이스와 미니는 현재 독일 베엠베(BMW) 그룹 내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공장은 여전히 영국에 있고 수많은 영국 노동자들이 몸담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왕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번 결혼식에서 가장 눈에 띈 차는 해리 왕자와 메건이 피로연장으로 이동할 때 사용한 재규어의 스포츠카 E타입이다. 1961년부터 1975년까지 생산된 이 차는 이탈리아 스포츠카 브랜드 페라리의 창업주인 엔초 페라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동차”라고 칭했을 정도로 멋진 디자인을 뽐낸다. 낮고 기다란 차체로 스포츠카의 이상적인 디자인을 완성했다고 일컬어진다. 뉴욕 현대 미술관 모마(MoMA)에 영구 전시되는 일곱 대의 자동차 중 하나이자 유일한 영국 차이기도 하다.
이 차는 출시 초기에는 3.8ℓ 직렬 6기통 엔진을 싣다가 1970년대에는 라이벌 차들의 출력이 올라가면서 5.3ℓ V형 12기통 엔진을 싣기도 했지만, 이번에 결혼식에 등장한 차량에는 엔진이 없다. 시대에 따른 환경 오염에 대한 인식 변화에 따라 전기차로 개조됐기 때문이다. 재규어는 지난해 타입 E를 전기차로 개조하는 ‘콘셉트 제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엔진이 있던 자리에는 40㎾h급 배터리가, 변속기가 있던 자리에는 전기 모터가 장착된다. 한 번 충전하면 270㎞를 달릴 수 있으며,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5.5초로 기존의 E타입보다 1초가 단축된 기록을 갖게 된다. 개조 비용은 40만달러(약 4억3천만원)로 비싼 편이지만, 아름다운 디자인의 클래식카를 오랫동안 달리게 하고 싶은 애호가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 이들의 결혼식 날짜를 기념하는 E타입이라는 의미로 번호판에 ‘E190518’이라는 글씨를 새긴 이 재규어 E타입은 앞으로도 영국 왕실의 역사를 담아 오래도록 보전될 예정이다.
‘콘셉트 제로’ 서비스는 상태가 잘 보존된 클래식 카와 40만달러가 있어야 받을 수 있지만, 이 차와 비슷한 전기 구동 장치를 장착한 재규어의 신차 ‘아이(i)페이스’는 조만간 국내에도 출시된다. 완충하면 480㎞를 달릴 수 있으며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4.8초만에 도달할 수 있는 성능을 갖췄다. 새로운 전기차 출시를 앞두고 과거의 유산을 멋지게 재해석한 영국인들의 재치가 돋보이는 순간이다.
신동헌(자동차 칼럼니스트·<그 남자의 자동차>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