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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도 돼?”···왜 맨날 침대에서 이 말을 하는 걸까?

등록 2018-05-24 09:55수정 2018-05-24 10:17

[ESC] 너 어디까지 해봤어?

30대 독신 여성의 고백
"섹스할 때 난 늘 대상"
오랫동안 고정화된 성 역할 영향
젠더 권력 무너져야 섹스도 즐거운 경험
클립아트 코리아.
클립아트 코리아.

17년 전 처음 섹스를 했다. 그러니깐 37살 솔로인 나는 17년째 섹스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어떤 분야에서든 이 정도의 시간은 꽤 다양한 경험을 포함한다. 몇 년 동안 한 남자와만 잠들던 시절이 있었고, 일주일 만에 서로 다른 두 사람과 관계를 맺은 적도 있었다. 때로는 술에 취한 채, 가끔은 제정신으로, 우여곡절 끝에 낯선 사람과, 어쩌다 보니 오랜 친구와 ‘해봤다’. 물론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와도 ‘해봤다’. 그런데 기억들의 결론이 약간 서글프다. 나는 정말 ‘좋은 섹스’를 해 본 적이 없다. 이런 고백에 으레 따라붙는 충고가 있는데, 미리 밝히자면 소극적인 태도나 노련한 기술, 오르가슴의 유무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대체로 욕망에 솔직하게 반응해 왔고 스스로 내 몸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다.

최고의 섹스를 해보지 못한 첫 번째 이유는 아주 흔한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언제 누구와 어떤 과정을 거쳐 침대에 뛰어들든 내가 어김없이 꺼내곤 했던 그 한 마디. “불 꺼도 돼?” 불을 끄자는 제안은 여러 이유에서 출발한다. 물론 대낮처럼 환한 60W 형광등 아래서 낭만에 젖는 게 쉽진 않다. 그러나 내가 전등 스위치를 단호하게 누르는 까닭은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상대방과 오래 만나 허물없는 사이로 진입하기 전에는 거의 언제나 그랬다. 그가 내 몸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몸을 움직일 때마다 겹쳐질 뱃살들을 보면 내게 실망하지는 않을까? 시시각각 바뀔 표정과 몸짓들은?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남자 사람’ 친구에게 이런 생각과 버릇을 털어놓았을 때, 그가 유쾌하게 뱉은 한 마디도 기억한다. “그럴 때 뱃살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친구의 충고는 맞는 이야기였지만 초점이 어긋난 충고였다. 나의 우려는 합리적 사고가 아닌 강박의 결과였다. 상대의 시선이 부르는 사소한 염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서로 자세하게 탐색하고 발견하게 만드는 빛이 사라진 후, 캄캄한 방안에서야 나는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성가신 긴장은 그 이후에도 이어진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갖고 있는 오랜 편견들 때문이다. 언젠가 잡지에서 읽었던 ‘더욱 좋은 섹스를 위한 30가지 하우 투’의 충고(‘그에게 당신이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도록 더 큰 소리를 내세요’ 같은 것)나 뻔한 영상들이 각인시킨 고정 관념들. 충분히 만족하지 않았는데도 ‘오늘 밤은 망한’ 것 같다는 사실을 알리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나는 일종의 연기를 시도한다. 가끔은 남자들 역시 필사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려 노력한다는 것을 느낀다. 두 개의 몸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없으나, 사실 그와 나는 서로 정말로 연결되지 않았다.

두 종류의 긴장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같은 이유에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섹스하기 전 또 한 번 방의 불을 꺼야 했던 어느날 밤, 문득 궁금해졌다. 어째서 나는 이토록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시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일까? 내 눈은 상대를 보고 있는데, 나는 왜 그에게 보이는 내 모습에 더욱 예민할까? 그러고 보면 ‘보이는’이라는 말의 문법 그대로, 남녀의 섹스에는 어쩐지 피동형 법칙이 있는 듯하다. 점잖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결코 등장하지 않는, 그러나 익명의 댓글들과 연애 관련 콘텐츠 누리집에서 범람하는 동사들을 떠올려본다. 과일나무의 열매를 수확할 때 쓰는 말을 차용한 동사다. 섹스의 통속적인 사전에서, 남자가 먹는 주체라면 여자는 먹히는 객체다. 관계가 끝난 후 ‘좋았냐’고 묻는 남자는 한심하지만, 똑같은 질문을 먼저 던지는 여자는 아예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정상위’라는 단어는 또 어떤가. 남자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동안 여자는 가만히 있는 자세를 통상 ‘정상’이라 일컫는 식은 눈부시게 아롱지는 욕망으로부터 유서 깊고 불공정한 성 역할을 드러낸다. 여성은 보여지고 남성은 본다. 여성은 청각적이고 남성은 시각적이다. 여성은 욕망의 대상이고 남성은 욕망의 주체다. 몇 해 전부터 쏟아지는 페미니즘의 이야기들은 이러한 구조가 섹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데이팅 앱에서 단 한 번의 접촉으로 낯선 이와의 하룻밤을 도모할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사회적으로 학습된 고정관념들은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순간 무심코 재생되곤 한다. 상대가 만족스럽지 않을까 봐 조명을 끄는 나의 손끝에서, 자신과의 섹스가 괜찮았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그의 혀 위에서.

이성애자로서 생각한다. 젠더의 권력 관계가 허물어질수록 섹스의 경험은 더욱 좋아질 것이라고. 두 사람 모두 욕망의 온전한 주체로서 서로를 바라본다. 기쁨의 온전한 주체로서 자유롭게 사랑을 나눈다. 최고의 섹스는 그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미로/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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