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 원장(왼쪽)이 패션쇼를 마친 후 이번 쇼를 함께 준비한 친동생 김은희씨(오른쪽)가 무대 위에 올라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 그루맘 제공
지난달 22일 서울 영등포 롯데백화점 문화홀에서 ‘용기 있는 여자들’이라는 이름의 특별한 패션쇼가 열렸다. 사회적 편견에 맞서 당당하게 엄마가 되길 선택한 비혼 엄마들이 모델로 나섰다. 비영리 패션 브랜드 ‘엠케이앤릴리’(MK&LILY)를 론칭한 아트스피치 김미경(55) 원장이 주최한 패션쇼에서였다. 이날 패션쇼에는 톱모델 박둘선씨를 비롯해 개그우먼 김지선, 아나운서 최은경 등 ‘스타 맘’ 17명도 모델로 참여했다.
“엄마가 최고로 예뻤고 제일 멋졌어!” 패션쇼 무대에서 막 내려온 이수현(가명·29)씨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객석에서 그를 지켜보던 초등학생 딸이 패션쇼가 끝나자마자 무대 뒤로 쪼르르 달려와 한 말 때문이다. 이씨가 모델에 도전하게 된 이유는 바로 딸 때문이다. “엄마도 아줌마도 아닌, 과거의 내 모습으로, 다른 20대처럼 예쁘게 꾸미고 나가는, 당당한 모습을 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삶”이었던 그는 예상에 없던 임신을 하고 고민 끝에 딸을 낳았다. 양육을 함께 해야 할 남자친구는 무책임했다. 그게 10년 전 일이다.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젠 비혼 엄마로 살아가는 삶이 두렵지는 않다. 친구 같은 예쁜 딸이 있기 때문이다.
비혼. 낯선 말이다. 과거엔 결혼하지 않고 홀로 자녀를 키우는 여성을 미혼모라 불렀다. 하지만 미혼은 결혼을 전제로 한 용어다. 여성의전화 송난희 정책국장은 “‘결혼은 선택’이라는 전제로 비(非) 자를 써서 비혼이라는 말을 쓴다”고 말한다. “그동안 비혼 엄마는 양육의 책임을 지는 훌륭한 사람들임에도 단지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저평가돼 왔다”며 “비혼 엄마라는 정체성을 드러내고 패션쇼를 했다는 건 그간의 사회적 낙인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선언으로 보인다. 이번 패션쇼는 용기 있는 비혼 엄마들이 만들어낸 위대한 성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경 원장의 어머니 홍순희 씨의 30년 전 작품 네벌도 이날 패션쇼에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사진 그루맘 제공
패션쇼에선 이수현씨 이외에 7명의 또 다른 비혼 엄마도 모델로 나섰다. 비혼 엄마들의 자립과 성장을 돕는 단체인 그루맘을 통해 공개 모집된 이들이다.
6년 전 비혼 엄마의 삶을 택한 안윤지(가명·31)씨는 그동안 잃었던 ‘떨림’을 이번 패션쇼를 준비하면서 다시 느꼈다고 했다. 이씨는 “힘들게 (아이를) 낳아 혼자 열심히 키웠는데, 잘못된 삶을 산다는 식으로, 사회적으로 저평가되는 게 속상했다”고 했다. “무대에 오르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건 오로지 우리 모녀를 위해서다. 이번 도전을 통해 내 딸에게만큼은 ‘닮고 싶은 당당한 여성’의 모습으로 비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이들 비혼 엄마 모델들에게 어려움도 있었다. 김가은(가명·35)씨는 막상 모델에 도전해 보니 해야 할 일이 만만찮았다. 불어난 체중을 건강한 체형으로 만들어야 했고, 워킹 연습도 매주 해야 했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서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아이 돌봄 서비스를 지원받고서야 안심하고 연습에 몰입할 수 있었다. 노력한 결과 12㎏ 감량에도 성공했다. 두 달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패션쇼 날이 다가올수록 불안이 커져만 갔다. 무엇보다도 딸아이 눈에 비칠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일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막판에 “딸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때처럼 이 쇼도 잘 해내자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날 모델로 등장한 방송인 정가은 씨, 톱모델 박둘선 씨가 무대 위를 걷고 있다. 사진 그루맘 제공
워킹 등 모델로서의 자세는 톱모델 박둘선씨가 지도를 맡았다. 박씨는 “원래 한 번 정도 재능 기부를 하려 했는데 비혼 엄마 모델들을 직접 만나보고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열의에 감동받아 도저히 일회성 수업으로 끝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전문 모델도 실력이 그렇게 빨리 안 는다. 평소 아이 키우느라 잘 신지 않았던 하이힐 때문에 발에 물집이 잡혔는데도 최선을 다하더라”며 “무엇보다도 그들의 눈동자가 생기 있게 빛났다”고 말한다.
이윽고 비혼 엄마들이 무대에 서자 플래시가 펑펑 터지고 음악에 맞춰 무대를 돌자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처음 서 본 패션쇼에 비혼 엄마들은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대 아래 딸들의 응원 소리가 큰 힘이 됐다.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 패션쇼가 끝나자 김가은씨는 대기실로 달려갔다. 워킹 스승인 박둘선씨의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선생님, 무대 위에서 제 아이와 눈을 마주쳤는데, 정말이지 너무 행복했어요!” 박씨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이거면 됐다’란 생각이 들면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차올랐다.
이런 벅찬 감정은 김가은씨만이 아니었다. 무대 뒤에 모인 비혼 엄마들은 저마다 부둥켜안고 울었다. ‘너무 만족해서’ ‘해냈다’는 마음에 흘리는 눈물이라고 그들은 입 모아 말했다. 그들 옆엔 엄마를 꼭 닮은 예쁜 딸들이 서 있었다.
이번 도전이 이들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박세희(가명·25)씨는 “그동안은 때때로 나 자신을 미워하느라 힘들기도 했다. 그런데 쇼를 준비하면서 과거 여러가지 좋았던 기억들이 생각났다”며 “쇼를 무사히 마치니 저도 쓸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와의 관계가 회복된 것 같다”고 말했다. 유지연(가명·24)씨는 “이번 도전은 모닝커피 같았다. 아침을 여는 커피처럼 제 인생을 힘차게 꾸려나갈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하면서 옆에 있던 딸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맑은 미소가 주변을 밝혔다.
회복, 떨림, 설렘, 새로운 기회. 8명의 비혼 엄마들이 패션쇼를 준비하면서 가장 자주 말했던 단어들이다. 이들 모녀의 당당하고 유쾌한 세상살이는 이제 시작이다.
우리 엄만 최고의 디자이너!
<언니의 독설> 등 베스트셀러를 통해 다정한 ‘쓴소리’를 해왔던 스타 강사 김미경씨가 이번에는 디자이너로 변신해 패션쇼를 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50년간 운영해온 ‘리리’양장점과 본인 이름을 본떠 만든 비영리 패션 브랜드 ‘엠케이앤릴리’(MK&LILY)를 선보인 자리에 그가 평소 지원해온 비혼 엄마들이 모델로 참여했다. 이날 수익금은 비혼 엄마 지원 사단법인 ‘그루맘’에 기부됐다. 지난달 24일 서울 연남동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패션쇼가 끝났다. 디자이너로 기분이 어땠나?
“정말 많은 디자이너에게 경의를 표한다. 패션쇼 직전까지 두려웠다. ‘저런 걸 옷이라고 만들었느냐’고 할까 봐. 그런데 막상 끝나고 나니 작은 소망들이 실체 없이 뒤섞여 있다가 진짜가 된 느낌이다.”
―패션쇼에 어머니 홍순희씨가 30년 전 제작한 옷도 등장했는데.
“엄마가 우리 집 네 딸들에게 해줬던 추억이 담긴 옷들이다. 내가 큰애 낳고 강의 갈 때 입고 가라고 해주신 옷, 언니가 행사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할 때 화려하게 보이라고 해준 옷, 동생이 신혼여행 갈 때 입으라고 해준 원피스, 엄마는 우리 집 딸들의 크고 작은 이벤트마다 옷을 해줬다. 모델들이 그 옷을 입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눈물 참느라 혼났다. 평생 자식들, 남편 뒷바라지에 시댁, 친정 다 거두느라 말 그대로 뼈 빠지게 일해서 지금 엄마가 많이 아프다. 엄마 꿈이 패션쇼 한번 해보는 거였는데 마음이 아프다.”
―기억나는 어머니의 모습이 있다면.
“옛날에 ‘내가 서울 갔으면 앙드레 김보다 더 유명했을 거’라고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했을 때는 속으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패션쇼에 올린 당신의 옷이 30년이 지났는데 촌스럽지 않다. 엄마는 충청도 증평 동네 사람들을 다 줄자로 재서 오직 그 사람만을 위한 패턴을 만들었다. 엄마는 실력 있는 디자이너였다. 꿈을 펼칠 수 있는 시절을 못 만난 ‘엄마 인재’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
―그간 비혼 엄마를 돕기 위한 패션쇼는 있었지만 이들이 직접 패션쇼에 오른 건 처음이다.
“사람이 사는 게 생계도 중요하지만 생명도 중요하다. 자존감은 생명을 이어 가는 힘이다. 한국 사회 특성상 아직은 기댈 곳이 많지 않은 비혼 엄마들에게 자존감은 훨씬 더 중요하고, 소중히 키워줘야 하는 힘이다. 이번 패션쇼는 자존감을 키워주는 과정이었다. 70여일 동안 다 같이 열심히 운동하고, 식이조절하고, 매주 모델 워킹 수업에 참여했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어제 쇼핑몰을 처음 오픈했다. 딱 한 달만 한시적으로 판매한다. 옷이 많이 팔려서 ‘그루맘’에 기부금을 팍팍 내고 싶다. 오는 6월부터는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캐나다, 미국 11개 도시를 돌며 토크쇼 투어에 나선다. 계속 도전하고 싶다.”
모녀 사이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이르는 말. 엄마의 모습을 닮아가면서 뿌듯해하거나 원망하는 딸, 자신의 삶과 같거나 다르게 살기를 바라는 엄마. 연관 검색어로 ‘모녀 여행’ ‘모녀 커플룩’ ‘모녀 영화’가 뜰 정도로 모녀 사이는 독특한 점이 있는 가족 관계.
김포그니 기자 pognee@hani.co.kr